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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April, 2024

Triumph

 <의지의 승리 (완결)> -삐삐삐삐…………. 오늘도 어김없이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직장인들이라면 다 공감할 거다. 기상 시간을 알리는 핸드폰 알람음이 얼마나 X같은지를.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왜냐고? 오늘은 그토록 고대하던 독일 여행일이거든. 아돌프 히틀러로서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우리 집에 있었다. 마침내,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아직도 그때 느꼈던 전율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운전면허시험에서 최종합격했을 때, 그리고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 느 꼈던 감정과 비교 불가능한, 최고로 짜릿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나는 내가 눈을 뜬 이 세상이 내가 알던 세상이 맞는지부터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바로 핸드폰을 들어 인터 넷에 접속했다. 내가 눈을 뜬 이곳은 내가 알던 본래 역사의 세상이 아닌, 내가 히틀러가 되어 역사를 바꾼 세상이었다. 나 자신도 많이 변했다. 히틀러가 되기 이전의 나는 흔하디흔한 평범한 방구석 백수 1에 불과했지만, 이 세상에서의 나 는 직장인이었다. 그것도 제법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 부모님 눈에 나는 여전히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들내미에 불과했지만. 밖으로 나왔을 때 보이는 풍경은 내가 기억하는 빙의 전 우리 동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건물들이 들 어서 있거나 원래 알던 길이 없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역시 동래구는 동래구인 것인가. 하지만 대한민국 전체는 달랐다. 일단, 분단과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북한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고 우리나라도 징병제 국가가 아닌 모병제 국가였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의 나는 원래 세계에서처럼 군필자였다. 대학등록금 마련 및 취직 혜택을 위해 단기사병으로 2년간 복무한 군필자. 참고로 지금의 대한민국 국군은 육해공군을 다 합쳐 12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즘 군에 입대하려는 사람들 이 없어 정부가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라고 한다. 내가 알던 원래 한국도 저출산 때문에 군대가 난리였는데 여기서도 상황이 비슷한 게 아이...

Adolf H

 < 아돌프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1889 - 197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태생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제22대 총리이자 제3제국의 초대 총통. *** 생애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독일 국경과 인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와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의 넷째로 태어났다. 히틀러에겐 이복형을 비롯해 여러 형제가 있었는데, 그가 태어날 무렵 친 형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아돌프가 태어난 직후 히틀러 가는 브라우나우암인을 떠나 린츠로 이주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지방 세무서장으로 자수성가한 모범적인 공무원으로 인정받았지만, 정작 가정에서는 걸핏하면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가장이었다. 알코올중독자에 폭력가장이기까지 했던 아버지 알로이스 때문 에 어린 시절 아돌프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화가가 되기를 희망한 아돌프와 다르게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공무원이 될 것을 강요했고, 둘은 자주 마찰을 빚었다. 말이 마찰이지 일방적으로 알로이스가 아돌프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아돌프는 얻어맞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로이 스는 아돌프의 화가를 향한 열정을 꺾지 못했다. 다만, 알로이스가 아버지에게 남긴 여러 영향 중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었다.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였던 알로이스는 자식들에게 자주 제국이 표방하는 다민족, 다문화적 가치를 주입했고, 그들이 사는 곳 린츠 또한 오스트리 아인과 체코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사는 도시였다. 그렇기에 훗날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이 된 이후로 독일에 만연하던 인종차별의 철폐에 심혈을 기울인 것에는 어린 시절에 배운 인종 간의 화합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 다. 1905년, 16살의 히틀러는 빈으로 상경해 국립미술학교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이듬해 그는 재수까지 했지만, 이번에도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시 학교 교장에게 찾아가 ...

Nevertheless, The World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6) > 미국의 경제제재가 시작되자 쿠바 경제는 순식간에 말라죽기 시작했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국은 쿠바와 교류하는 국가는 재미없을 거라고 사방팔방에 경고의 눈길을 쏘아 보냈고 미국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하다는 것을 캐치한 남미 국가들은 쿠바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유럽은 애초에 쿠바와 별 교류가 없었고 아시아 국가들 역시 먼 쿠바와 교류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경제가 곤두박질치자 자연스레 사람들의 생활 역시 개판으로 변했다. 특재자가 를러나고 진정한 인민의 세상이 왔다고 기빼하던 쿠바인틀은 경제가 개판으로 변하자 없는 살림에 플칠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앨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도 삶은 더 어려워져만 갔다. 가장 먼저 화폐가 휴지조각이 됐고 생필품이 부족해졌다. 정부에서 집단능장을 운영하여 능업생산을 장려했지만, 미국의 강력한 경제제재로 인해 사람들은 늘 끼니를 격정해야 했다. 탕 하나, 감자 한 틀이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되었고 고기나 과일은 구경조차 힘들어졌다. 식량뿐 아니라 의약품도 문제였다. 사람은 평생 견강할 수는 없는 노롯이고, 병에 결리거나 일을 하다가 다치는 동 여러 가지 이유로 병원에 들르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약울 상시 구비해둔다. 그런데 그 약이 없다면? 경제제재도 문제지만, 쿠바 내부의 적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대다수 쿠바인은 카스트로 정권을 지지했지만, 카스트로 정권에게서 '적대계층'으로 분류된 반공 인사들, 지주 계층은 카스트로 정권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당연히 이들을 지원하는 국가는 미국, 미국과 쿠바 사이는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두 나라는 국교를 단절했다. 국교를 단절했어도 상항은 변하지 않았다. 쿠바가 국교단절울 선언하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재를 더욱 강화했고 쿠바 경제는 습을 쉬지 못해 사지가 벽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 가다간 전 ...

Nevertheless, The World 5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5)> "예상컨대 쿠바가 조용히 있는 한 미국도 쿠바를 가만히 내버려 듈 걸세. 괜히 벌집을 쑤셔봤자 미국 입장에서도 좋울거하나 없으니. 바티스타의 예를 보듯 아무리 친미파라고 한틀 무능해도 너무 무능해서 별도움이 안 된다고 판탄되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 현미국 정부의 방침이다. 반면에 소련과 베트남의 경우처럼 빨갱이라고 해도 미국의 국익에 부할한다고 판단되면 그냥 넘어가 주고, 실제 역사에서처럼 혁명에 성공했지만, 이후로는 카스트로가 어떤 행보를 걸을지는 아직까지는 감이 안 잡힌다. 역사에서 카스트로는 집권 초반에는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개혁 과정에서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을 몰수했고 그 탓에 미국과 척을 지고 말았다. 쿠바의 개혁을 위해선 쿠바 경제에 깊숙하게 뿌리내린 미국 기업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했기에 어쩔 수 없는 족면도 있었고, 또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의 강력한 지지와 지원이 있었기에 카스트로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이 세계는 많이 다르다. 누누이 말했듯이 소련은 남의 나라 지원은 고사하고 제 살림 청기는 것도 바쁜 입장. 따라서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는 선택지는 꿈도 꿀 수 없다. 소련제 핵미사일을 자국에 배치해 핵전쟁 위기를 일으킨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깝다. :제아무리 카스트로가 골수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현실이 이러니 타협을 하지 않을까 싶네만." "하긴, 뒷배도 없는데 미국을 상대로 깝죽거리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지요. 자기들 돌마니인 바티스타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해 칼같이 손절한 것처럼, 카스트로가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공산당 정권이어도 묵인할 가능성이 컸다. 카스트로도 생각이란 게 있는 한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고. 만약 미국과 쿠바 사이에 전쟁이 터진다면 누가 쿠바를 도우려고 할까? 소련이? 아니면 몽골, 베트남이? 어림도 없는 소리지. 카스트로도 이들이 도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테니 최대한 조용히 있으려...

Nevertheless, The World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4) > 1958년은 인류 역사에 한 획울 그은 해가 되었다. 1월, 특일의 핵전력에 전전긍긍하던 미국은 태평양 마설 제도에서 행한 수차례의 실힘 끝에 역사상 두 번째로 수소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수소폭탄 개발로 미국 전역은 들썩거렸다. 신문사마다 수소폭탄 실험 성공 소식을 보도했고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환호했다. 핵전쟁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전쟁이 나면 독일도 궤멸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물론 미국보다 몇 단계나 앞선 로켓 기술을 보유한 독일이 조금 더 유리하다고 점쳐졌지만, 전쟁이 터진다면 독일도 자국에 막대한 피해가 생기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수폭 실험 성공으로 조성된 축하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의 수폭 실험 성공보다 몇 배는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958년 4월 12일, 독일 공군 조종사 베른하르트 크라머가 우주선 체펠린 1호를 타고 우주로 나갔다. 인류 최초로 우주로 나가는 데 성공한 크라머는 지구 궤도를 돌며 '지구는 푸르다'라는 말을 남겼다. 특일이 거둔 또 하나의 위대한 승리예 톡일 전역은 열광했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것에 이어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독일에서 탄생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수만 년에 결친 인류 역사에서 해내지 못한 일을 독일이 해낸 것이다! 독일의 거리는 지크 하일을 외치는 우령찬 욕소리로 가득 찾고, 식당과 맥주홀마다 손님들로 짝 찾다. 베른하르트 크라머의 우주유영은 미국의 자존심에 또 한 번 름직한 스크래치를 남졌다. 독일은 우주에 사람을 내보내는데 천하의 미국은 아직도 로켓 문제로 씨름이나 하고 있다니 백악관도 자국민들의 푸념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맥아더는 하루가 멀다고 NASA에 전화를 결어 로켓 개발 현황에 대해 보고받았다. -언제까지고 우리만 뒤처질 수 없소.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말씀하시오. 내 사비라도 털어서 지원해 졸 터이니. 독일의 로켓 개발을 따라가기 위해 미국은 막대한 자...

Nevertheless, the world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3) > 식민지로 네덜란드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해오다가 눈물겨운 투쟁 끝내 독립을 쟁취한 인도네시아. 그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카르노는 갓 독립한 신생국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며 나라를 안정화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다행히도 독일과 냉전에 들어간 미국은 하나라도 더 많은 국가를 자국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독일의 극동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도 적잖은 지원을 해줬다. 미국에서 생산된 식량으로 굶주린 인도네시아인들의 배를 채우고 미국의 공장들에서 만들어진 트럭이 인도네시아로 배달되어 인도네시아의 재건에 여러모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카르노도 이러한 미국에 접근해서 더 많은 지원을 타냈다. 이대로 쭉 간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테지만 본래 인간이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어지는 법. 인도네시아의 재건이 얼추 이루어지고, 지방에서 활개 치던 군벌들의 정리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수카르노는 영토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가 눈독을 들인 곳은 말레이시아의 사바와 사라왁. 그리고 뉴기니 섬 전체 포클랜드 제도를 욕심낸 아르헨티나가 어떤 꼴이 되는지 봤음에도 불구하고 수카르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즉시 미국의 경고장이 날아왔다. '허튼 수작질 부리지 마라! '국경을 넘는 즉시 자카르타에 폭탄이 떨어질 것' '원조 모두 끊겨서 국민들 기아로 죽는 꼴 보고 싶으면 각오해라.' 맥아더는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또 사고를 치려고 벼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짜증이 치밀었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백악관의 분노가 듬뿍 담긴 경고장을 받아 든 수카르노의 이마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를 어쩌지? 국민에겐 큰소리 떵떵 쳐놨는데. 수카르노는 틈만 나면 라디오 방송에 나와 사바, 사라왁과 뉴기니는 인도네시아가 되찾아야 할 영토라며 선동을 일삼았고 인도네시아 국민도 수카르노의 말에 동조해 영토 회복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앞에서 이빨 깔 때...

Nevertheless, The World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2) > 헝가리는 주변에 적이 많았다. 슬로바키아가 그랬고 루마니아가 그랬으며 우크라이나와도 영토 문제로 관계가 썩 좋지 못했다. 그래도 2차대전 동안 독일의 동맹으로 소련에 대항해 싸웠고 전쟁이 끝나고 국경 문제도 일단락되면서 영토 분쟁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같은 추축국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큰형님 독일의 강권도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세르비아와는 도저히 관계가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가 없었다. 세르비아 정부의 공식 주장은 아니지만, 세르비아인들은 헝가리가 자국 영토를 강탈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녔고 헝가리 역시 아직 세르비아에서 받아올 영토가 많이 남아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헝가리 민족주의자인 호르티의 눈에 세르비아는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툭하면 분쟁이나 일으키는 건달패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는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할 때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세르비아의 추축국, 유럽연합 가입에 반대했다. 세르비아가 혼란에 빠지자, 호르티는 흥분했다. 그에게 이번 사태는 눈엣가시 같은 세르비아를 다시 손봐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히틀러와 만난 자리에서 호르티는 자신의 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세르비아는 예로부터 갱생이 불가능한 종자들이라 채찍과 몽둥이를 사용해야만 겨우 길들일 수 있다. 세르비아가 다시는 분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이번에 아주 철저하게 짓밟아줄 필요가 있다. "지금 세르비아 영토는 놈들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넓습니다. 이번 기회에 여러 갈래로 찢어놓는 것이 어떠신지?" 호르티는 히틀러에게 세르비아의 분할을 제안했다. 수도 베오그라드와 그 주변 땅덩어리만 남겨두고 조각조각 나눠서 일부는 합병하고 일부는 괴뢰국으로 만들어 세르비아인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자. 세르비아인들이 서로 뭉치지 못하게끔 뒤에서 조종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게 내버려 둔다면, 유럽은 50년이고 100년이고 영원토록 평화로울 것이다. 헝가리와 영토 문제로 감정이 그렇게 좋지 않은 크...

Peace on a Blade 1

 <칼날 위의 평화 (1) > 중국에서 일어난 군벌들의 반란은 큰 반전 없이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반란을 일으킨 군벌들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동조해 중앙군의 진압을 방해하거나 비협조로 일관한 군벌들도 장제스가 휘두르는 숙청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내전은 끝났지만, 본격적인 숙청은 이제부터였다. 지방에서 왕으로 군림하던 자들은 남의사의 표적이 되어 제거당하거나 압송되었다. 자신이 숙청 대상임을 눈치채고 외국으로 망명을 시도한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성공하진 못했다. 장제스의 숙청은 해를 넘겨서도 진행되었고 숙청이 끝났을 무렵엔 중국에서 장제스에게 대항할 자가 남지 않았다. 이런 거 보면 장제스가 능력이 없는 인물은 아니라니까. 그놈의 땅 욕심만 부리지 않았으면 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튼, 내부의 불안요소들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한 장제스는 본격적인 개혁을 선언했다. 더 이상 개혁에 반기를 들거나 방해할 놈들도 없어졌으니, 순탄하게 흘러갈 것 같으면서도 죽은 건 윗대가리들이고 밑에서 꼬붕짓하며 열심히 뇌물을 받아 처먹던 말단들은 그대로라 과연 개혁이 성공적일지는 말이 많은 상태다. 그래도 실제 역사에서도 개혁을 성공시킨 적 있는 양반이니 기대를 걸어봐도 나쁘진 않겠지. 측근인 다이리도 멀쩡하게 살아있고, 확실한 건 대약진운동이니 문화대혁명이니 하는 희대의 개뻘짓들은 일어나지 않겠지. 그렇고말고. 존더코만도와 형벌부대는 스페인 군복을 입고 모로코에서 반군과 싸우는 중이다. 징징거리는 프랑코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보낸 데다 이들에게 딱히 싸울 이유도 의지도 없다고 판단해서 전투력은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웬걸. 모로코에서도 상당한 전투력을 보여주며 맹활약 중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내긴 했지만, 형식적으로 스페인군 소속에 스페인 군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나온 얘기는 없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무서워서 조용히 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뒷말 안 나온다고 하니 그걸로 된 거겠지. 새...

World of Conflict 9

 <분쟁의 세계 (9) > 한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굴다가 귀신같이 손절한 파시스트당의 똘마니들. 제가 가져다 바친 에티오피아 황제 직위와 알바니아 국왕 자리는 낼름 받아 처먹으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입을 싹 씻은 무능한 국왕. 그리고 선동에 휩쓸리기만 할 뿐인 국민들까지. 자길 이용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자기들은 깨끗한 척, 관련 없는 척 꼴값을 떠는 버러지 새끼들. 모든 게 꼴 보기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다 부수고 싶었다. 자길 배신하고 똥통에 처박은 이 나라도 전부 다. 그래서 히틀러로부터 권력을 되찾아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땐 잠깐이나마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무솔리니는 현실을 자각했다. 아직 이탈리아에 자신의 지지자들이 남아있다곤 하나 그 세력이 큰 것도 아니다. 자신에 대한 반대파가 더 컸으면 컸지. 소수의 지지자만 믿고 정치를 하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다. 이미 다수의 국민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는데 무슨 방법으로 이들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총칼을 이용하면 안 될 것도 없지만 그래서야 더 큰 불만과 반발만 부를 게 뻔했다. 무엇보다도 예전처럼 권력을 쥐게 되더라도 그건 온전히 무솔리니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독일의 도움으로 권력을 쥐었으니, 독일의 지시에 따라야만 할 터. 되려 독일의 충견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소수의 지지층을 제외한 이탈리아 전체를 적으로 돌린 상태에서 독일의 조력을 받는다고 한들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그마저도 그 자신만의 온전한 통치가 아닌 독일의 지시를 따르는 처지일 텐데. 그렇기에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미 이탈리아인들은 내게서 등을 돌렸소, 강제로 그들을 복속시킨다고 한들 예전처럼 진심으로 따르는 게 아닌 강압에 의한 굴종이니 오래 갈 수 없을 터. 결국에는 또 한 번 내전이 일어나겠지. 지금도 위태로운데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이탈리아는 정말로 끝이오. 다시 예전처럼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도시 국가들로 나뉘어 서로...

World of Conflict 1

 <분쟁의 세계 (1)> 이탈리아에게 전쟁이 끝난 지도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8년이라는 제법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탈리아의 사정은 그리 좋아지지 못했다. 패전으로 이탈리아가 물게 된 막대한 배상금은 이탈리아 경제를 악화시켰고 나라를 망친 왕정과 국가 파시스트당을 향한 원성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무솔리니는 권력을 잃었지만, 파시스트당의 권력은 변함이 없었고 이탈리아는 여전히 독재국가로 남아있었다. “개같은 파시스트 놈들. 전쟁에서 진 주제에 아직도 거들먹거리고 다니기는” “저놈 저놈 잡아!" “제, 제가 뭐 때문에 잡혀 온 겁니까? 전 맹세코 어떤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일주일 전 네가 직장에서 국왕이 양심이 있으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한 것을 네 동료들이 다 들었다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우리가 호구로 보이냐?" “국왕 폐하가 네 친구야? 이 새끼야?" 국왕과 파시스트당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금지였고, 이를 어기는 이들은 어김없이 경찰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전 억울합니다!" “히틀러를 욕한 게 죄라고요? 그자가 이탈리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잖습니까?" “시끄러워, 정부 방침을 어겼으니 벌은 받아야지.” “그러게 누가 너한테 히틀러 욕하라고 시키든?” 심지어 독일에 대하여 비판적인 언사를 하는 것 또한 금지되었다. 독일이 유럽을 통일한 뒤, 이탈리아는 24시간 내내 독일 눈치를 살폈다. 히틀러의 심기가 뒤틀리는 순간, 로마가 불바다가 되고 독일 전차들이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 영토로 물밀듯이 들어올 것이라는 불안에 이탈리아는 바짝 엎드리는 것을 선택했다. “저 개새끼들!" “나라를 말아먹은 놈들이 반성은커녕 아직도 고개를 쳐들고 다니다니... 씨발.” “무솔리니만 문제가 아니라 국왕도, 그 졸개 놈들도 다 똑같은 놈들이야! 더러운 식충이들 같으니라고!" “언제는 독일 놈들을 욕하더니 이제 와서는 놈들의 창녀 노릇이나 하는 꼴이라니. 배알...

Nevertheless, the world is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1) > 비록 로켓개발에선 독일보다 한참 뒤떨어진 미국이었지만, 이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속보! 소아마비 백신 개발 성공!' '조너스 소크 박사, 소아마비 백신 개발 발표!' '세기의 대발견! 소아마비의 공포는 사라질 것인가?” 소아마비. 인류 역사와 함께하며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힌 끔찍한 질병 중 하나. 매년 1만 건이 넘는 발병 사례와 1천 건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최악의 전염병인 소아마비는 2차대전 이후로 더욱 기승을 부렸는데 선진국이자 세계 최강국인 미국 역시 이 소아마비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인이 된 지 오래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역시 소아마비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으며 소아마비에 걸리는 아이들의 수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성인이라고 해서 병에 안 걸리는 것도 아니었기에 애어른을 막론하고 소아마비의 공포에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인류를 오래도록 공포에 떨게 한 소아마비의 백신이 개발되었다. 1954년 4월 12일에 발표된 조너스 소크 박사의 백신 개발 소식은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소아마비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음에 기뻐했다. 해당 소식은 곧 미국을 넘어 지구 곳곳으로 전해졌다. "축하드립니다, 박사님. 박사님의 연구가 앞으로의 인류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래서 말입니다. 백신의 특허권은 누가 갖게 되나요? 전 미국인들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아마도 사람들이겠죠. 특허 같은 건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소크는 특허를 내는 대신 백신을 무료로 풀겠다고 공언했고, 덕분에 백신은 빠른 속도로 미국 전역에 공급될 수 있었다. 소아마비 백신 개발 소식에 백악관 역시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제껏 로켓개발 건으로 독일에 비교만 당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