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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Octobe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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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6월 15일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우리는! 실험 쥐가! 아니다!” “흑인도 사람이다!" “정부는 즉시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대통령은 사죄하라!” 터스키기 실험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흑인은 거리로 나왔다. 이곳, 뉴욕에 사는 흑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소부, 부두 노동자, 가게 점원처럼 가난하고 천대받는 직종에 종사하는 흑인들부터 변호사, 음악가, 은행원 등 흑인들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에서도 상류층에 속하는 흑인들도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평소 가난한 흑인들을 멸시하며 자신들은 보통의 흑인들과 구별되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그들에게 그들이 멸시하는 하류층의 흑인들과 연대하게 했다. 정부가 흑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며 1년 동안 얼마를 벌고 어디에서 살든 간에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모든 흑인은 분노를 토해내며 브로드웨이를 행진했다. 자신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똑같이 화를 내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 소수나마 백인과 황인,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섞여 있었지만, 시위대의 절대다수는 흑인들이었다.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대의 선두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제시 오언스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이 벌어진 터스키기와 오언스가 태어난 오크빌은 같은 앨라배마 주에 속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언스는 환대는커녕 철저한 냉대와 무시, 억압을 받았다. 올림픽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온 오언스에게 미국 체육회는 아마추어 자격 철회로 답했고, 오언스는 국제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주요소 직원과 체육관 청소부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지내야 했다. 베를린에서 그가 받았던 환대와 너무나 비교되는 조국에서의 차별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그에게 터스키기 소식이 들렸다. 그는 바로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이끌었다. 백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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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싸울 것은 (4) > 1943년 3월 29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태평양에선 미군이 타라와에 상륙했고, 일본군은 인도 아삼 지방의 임팔을 공 격했다. 혹시나 싶어 알아보니 역시나. 임팔 공격을 지시한 일본군 사령관의 이름은 무타구치 렌야였다. 21세기에도 회자되는 명언들을 많이 남긴 일본 육군 최고의 졸장. 그나마 인도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영국군의 상태 또한 말이 아니니 실제 역사 보다 일본에 유리한 입장이긴 해도 결말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애당초 인도가 얼마나 넓은데, 중국과 동남아에서도 싸우기 바쁜 일본이 그 넓은 인도를 공략하는 건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키는 것과 같다. 아무튼, 일본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영국은 인도 방어를 위해 추가 병력을 증 파했다. 영국이 인도에 파견한 사단의 숫자는 3개.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육군이 반토막 난 지금의 영국에게 개 사단 파 병은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수준의 지출이었다. 똑같은 1만 원이라도 150만 원의 월급을 받는 사람과 500만 원을 받는 사람 에게 가지는 가치가 다르듯이 말이다. 어쨌든 독일에는 잘된 일이다. 영국이 인도를 두고 일본과 박터지게 싸울수록 바다사자 작전의 성공률이 올라갈 테니. 우리는 우리 일이나 신경 쓰면 그만이다. “총통 각하. 코스모스 작전의 결과에 대해서 보고드립니다.” 하이드리히는 영국이 우리 암호를 어디까지 해독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바퀴 5개를 사용하는 구형 에니그마와 8개 바퀴를 사용하는 후기형 에니그마, 그리 고 로렌츠로 노르웨이의 각기 다른 무인도에 해군항공대를 위한 활주로를 건설 했다는 내용의 통신문을 발송했다. 로렌츠와 후기형 에니그마를 이용해 통신문을 발송한 섬에는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지만, 구형 에니그마를 이용해 통신문을 발송한 섬은 얼마 못 가 RAF 의 기습 폭격을 받았다. 이로써 우리는 영국이 로렌츠는커녕 후기형 에니그마조차 해독하지 못했다 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지. 튜링도 없는데도 구형 에니그마까지 해독해냈으...

153-154

 153 <창과 방패 (3) > 서기장으로부터 핀란드를 공격할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티모셴코는 당 혹감을 느꼈다. 일찍이 전부터 소련은 핀란드를 재침공해 완전히 합병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 었고, 티모셴코와 주코프도 핀란드 침공계획 수립에 참여했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핀란드도 우크라이나, 발트 3국처럼 정복하여 소 비에트 연방의 영토로 삼아야 한다는 것에는 둘도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눈앞의 적인 독일도 제대로 밀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핀란드를 공격한다니. 스탈린은 독일과 손잡고 소련을 우롱한 핀란드에 대한 보복이라고 단언했지 만, 티모셴코가 볼 때 핀란드 침공은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일이었다. 독일에 전 전력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에 적대국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은 전 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역으로 핀란드 국경과 가까운 레닌그라드와 무르만 스크가 위험해질 우려가 있었다. 그랬기에 티모셴코는 스탈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부지런히 애를 썼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미 핀란드를 공격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고, 티모셴코 가 아무리 설득을 시도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떡하기는. 이제 핀란드군과도 싸우게 되는 거지.” 핀란드군의 규모는 붉은 군대나 독일군보다도 작지만, 전투력은 결코 얕볼 수 없었다. 냉정하게 평가해서, 핀란드군 1명의 전투력은 소련군 3명의 전투력과 동급이 었다. 겨울전쟁에 참전하여 핀란드군과 직접 싸워본 적이 있는 티모셴코가 내린 평 가였다. “빨리 영국이 참전해야 할 텐데....” 주코프의 중얼거림에 티모셴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제국주의자 처칠은 독일을 무찌르기 위해 소련에 협력할 뜻이 있음을 밝 혔고 소련이 독일과 싸우는 동안 자신은 독일의 뒤통수를 치겠노라고 단언했었 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영국은 독일과 중립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처칠 내각에선 독일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독일과 사 생결단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소련 입장...

151-152

Chapter 151 <창과 방패 (1) > 1942년 5월 29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독소전쟁 발발 당일부터 독일은 전시경제체제로 돌입한 상태였지만, 괴벨스 의 연설로 이제는 전 국민이 독일이 총력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장품을 비롯한 사치품 생산은 공식적으로 중단되었고, 배급 쿠폰이 다시 지 급되기 시작했으며 징집 연령대인 18~35세의 모든 남성은 한 명도 빠짐없이 지역 사무소로 출두하여 의무적으로 신검을 받아야 했다. 나는 여군의 모집도 동시에 실시했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즉각 반대 의견들 이 튀어나왔지만, 신성한 국방의 의무에 성별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고 한마디 해주자 쏙 들어갔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공장에서 일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소? 국가가 위기 에 처했으니 전 국민이 하나로 뭉쳐야지 이건 되고 이건 안 되고를 따질 겨를이 어디에 있소? 그리고 징병이 아니라 엄연히 지원자만 받아들이는 것이니, 국민 들의 원망을 살 일도 없소.” 소련은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여성들의 입대를 받아들였고 실제로 수십만 명 에 달하는 여자들이 군에 입대하여 포병, 전차병, 저격수, 전투기 조종사 등으로 전선 각지에서 활약했다. 대표적인 예시로 독일군 309명을 사살한 전설적인 저격수 류드밀라 파블리 첸코와 ‘밤의 마녀들(HouHble BeAbMbi)'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제46근위야간 폭격비행연대가 있다. 소련도 그랬는데 독일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지. 그래도 시대와 국민의 인식, 장군들의 꾸준한 반대를 고려하여 여군들을 보병 이나 공병, 기갑병 등의 최전선에서 굴러야 하는 전투병과에 배치하는 것은 피 하고 행정병, 취사병, 운전병, 위생병, 통신병, 대공포병 등 비교적 안전한 보직으 로만 배치하기로 합의를 봤다. 후방 및 비전투보직에 배치되는 여군들의 수만큼 최전선 및 전투보직에 배치 할 수 있는 병사들의 수가 늘어나는 셈이니 장군들도 찬성했다. “하이드리히, 영국의 동향은 어떤가?" “평소처럼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