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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umph

 <의지의 승리 (완결)> -삐삐삐삐…………. 오늘도 어김없이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직장인들이라면 다 공감할 거다. 기상 시간을 알리는 핸드폰 알람음이 얼마나 X같은지를.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왜냐고? 오늘은 그토록 고대하던 독일 여행일이거든. 아돌프 히틀러로서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우리 집에 있었다. 마침내,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아직도 그때 느꼈던 전율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운전면허시험에서 최종합격했을 때, 그리고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 느 꼈던 감정과 비교 불가능한, 최고로 짜릿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나는 내가 눈을 뜬 이 세상이 내가 알던 세상이 맞는지부터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바로 핸드폰을 들어 인터 넷에 접속했다. 내가 눈을 뜬 이곳은 내가 알던 본래 역사의 세상이 아닌, 내가 히틀러가 되어 역사를 바꾼 세상이었다. 나 자신도 많이 변했다. 히틀러가 되기 이전의 나는 흔하디흔한 평범한 방구석 백수 1에 불과했지만, 이 세상에서의 나 는 직장인이었다. 그것도 제법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 부모님 눈에 나는 여전히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들내미에 불과했지만. 밖으로 나왔을 때 보이는 풍경은 내가 기억하는 빙의 전 우리 동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건물들이 들 어서 있거나 원래 알던 길이 없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역시 동래구는 동래구인 것인가. 하지만 대한민국 전체는 달랐다. 일단, 분단과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북한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고 우리나라도 징병제 국가가 아닌 모병제 국가였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의 나는 원래 세계에서처럼 군필자였다. 대학등록금 마련 및 취직 혜택을 위해 단기사병으로 2년간 복무한 군필자. 참고로 지금의 대한민국 국군은 육해공군을 다 합쳐 12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즘 군에 입대하려는 사람들 이 없어 정부가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라고 한다. 내가 알던 원래 한국도 저출산 때문에 군대가 난리였는데 여기서도 상황이 비슷한 게 아이...

Adolf H

 < 아돌프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1889 - 197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태생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제22대 총리이자 제3제국의 초대 총통. *** 생애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독일 국경과 인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와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의 넷째로 태어났다. 히틀러에겐 이복형을 비롯해 여러 형제가 있었는데, 그가 태어날 무렵 친 형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아돌프가 태어난 직후 히틀러 가는 브라우나우암인을 떠나 린츠로 이주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지방 세무서장으로 자수성가한 모범적인 공무원으로 인정받았지만, 정작 가정에서는 걸핏하면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가장이었다. 알코올중독자에 폭력가장이기까지 했던 아버지 알로이스 때문 에 어린 시절 아돌프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화가가 되기를 희망한 아돌프와 다르게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공무원이 될 것을 강요했고, 둘은 자주 마찰을 빚었다. 말이 마찰이지 일방적으로 알로이스가 아돌프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아돌프는 얻어맞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로이 스는 아돌프의 화가를 향한 열정을 꺾지 못했다. 다만, 알로이스가 아버지에게 남긴 여러 영향 중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었다.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였던 알로이스는 자식들에게 자주 제국이 표방하는 다민족, 다문화적 가치를 주입했고, 그들이 사는 곳 린츠 또한 오스트리 아인과 체코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사는 도시였다. 그렇기에 훗날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이 된 이후로 독일에 만연하던 인종차별의 철폐에 심혈을 기울인 것에는 어린 시절에 배운 인종 간의 화합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 다. 1905년, 16살의 히틀러는 빈으로 상경해 국립미술학교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이듬해 그는 재수까지 했지만, 이번에도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시 학교 교장에게 찾아가 ...

Nevertheless, The World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6) > 미국의 경제제재가 시작되자 쿠바 경제는 순식간에 말라죽기 시작했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국은 쿠바와 교류하는 국가는 재미없을 거라고 사방팔방에 경고의 눈길을 쏘아 보냈고 미국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하다는 것을 캐치한 남미 국가들은 쿠바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유럽은 애초에 쿠바와 별 교류가 없었고 아시아 국가들 역시 먼 쿠바와 교류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경제가 곤두박질치자 자연스레 사람들의 생활 역시 개판으로 변했다. 특재자가 를러나고 진정한 인민의 세상이 왔다고 기빼하던 쿠바인틀은 경제가 개판으로 변하자 없는 살림에 플칠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앨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도 삶은 더 어려워져만 갔다. 가장 먼저 화폐가 휴지조각이 됐고 생필품이 부족해졌다. 정부에서 집단능장을 운영하여 능업생산을 장려했지만, 미국의 강력한 경제제재로 인해 사람들은 늘 끼니를 격정해야 했다. 탕 하나, 감자 한 틀이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되었고 고기나 과일은 구경조차 힘들어졌다. 식량뿐 아니라 의약품도 문제였다. 사람은 평생 견강할 수는 없는 노롯이고, 병에 결리거나 일을 하다가 다치는 동 여러 가지 이유로 병원에 들르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약울 상시 구비해둔다. 그런데 그 약이 없다면? 경제제재도 문제지만, 쿠바 내부의 적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대다수 쿠바인은 카스트로 정권을 지지했지만, 카스트로 정권에게서 '적대계층'으로 분류된 반공 인사들, 지주 계층은 카스트로 정권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당연히 이들을 지원하는 국가는 미국, 미국과 쿠바 사이는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두 나라는 국교를 단절했다. 국교를 단절했어도 상항은 변하지 않았다. 쿠바가 국교단절울 선언하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재를 더욱 강화했고 쿠바 경제는 습을 쉬지 못해 사지가 벽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 가다간 전 ...

Nevertheless, The World 5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5)> "예상컨대 쿠바가 조용히 있는 한 미국도 쿠바를 가만히 내버려 듈 걸세. 괜히 벌집을 쑤셔봤자 미국 입장에서도 좋울거하나 없으니. 바티스타의 예를 보듯 아무리 친미파라고 한틀 무능해도 너무 무능해서 별도움이 안 된다고 판탄되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 현미국 정부의 방침이다. 반면에 소련과 베트남의 경우처럼 빨갱이라고 해도 미국의 국익에 부할한다고 판단되면 그냥 넘어가 주고, 실제 역사에서처럼 혁명에 성공했지만, 이후로는 카스트로가 어떤 행보를 걸을지는 아직까지는 감이 안 잡힌다. 역사에서 카스트로는 집권 초반에는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개혁 과정에서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을 몰수했고 그 탓에 미국과 척을 지고 말았다. 쿠바의 개혁을 위해선 쿠바 경제에 깊숙하게 뿌리내린 미국 기업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했기에 어쩔 수 없는 족면도 있었고, 또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의 강력한 지지와 지원이 있었기에 카스트로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이 세계는 많이 다르다. 누누이 말했듯이 소련은 남의 나라 지원은 고사하고 제 살림 청기는 것도 바쁜 입장. 따라서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는 선택지는 꿈도 꿀 수 없다. 소련제 핵미사일을 자국에 배치해 핵전쟁 위기를 일으킨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깝다. :제아무리 카스트로가 골수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현실이 이러니 타협을 하지 않을까 싶네만." "하긴, 뒷배도 없는데 미국을 상대로 깝죽거리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지요. 자기들 돌마니인 바티스타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해 칼같이 손절한 것처럼, 카스트로가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공산당 정권이어도 묵인할 가능성이 컸다. 카스트로도 생각이란 게 있는 한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고. 만약 미국과 쿠바 사이에 전쟁이 터진다면 누가 쿠바를 도우려고 할까? 소련이? 아니면 몽골, 베트남이? 어림도 없는 소리지. 카스트로도 이들이 도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테니 최대한 조용히 있으려...

Nevertheless, The World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4) > 1958년은 인류 역사에 한 획울 그은 해가 되었다. 1월, 특일의 핵전력에 전전긍긍하던 미국은 태평양 마설 제도에서 행한 수차례의 실힘 끝에 역사상 두 번째로 수소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수소폭탄 개발로 미국 전역은 들썩거렸다. 신문사마다 수소폭탄 실험 성공 소식을 보도했고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환호했다. 핵전쟁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전쟁이 나면 독일도 궤멸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물론 미국보다 몇 단계나 앞선 로켓 기술을 보유한 독일이 조금 더 유리하다고 점쳐졌지만, 전쟁이 터진다면 독일도 자국에 막대한 피해가 생기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수폭 실험 성공으로 조성된 축하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의 수폭 실험 성공보다 몇 배는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958년 4월 12일, 독일 공군 조종사 베른하르트 크라머가 우주선 체펠린 1호를 타고 우주로 나갔다. 인류 최초로 우주로 나가는 데 성공한 크라머는 지구 궤도를 돌며 '지구는 푸르다'라는 말을 남겼다. 특일이 거둔 또 하나의 위대한 승리예 톡일 전역은 열광했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것에 이어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독일에서 탄생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수만 년에 결친 인류 역사에서 해내지 못한 일을 독일이 해낸 것이다! 독일의 거리는 지크 하일을 외치는 우령찬 욕소리로 가득 찾고, 식당과 맥주홀마다 손님들로 짝 찾다. 베른하르트 크라머의 우주유영은 미국의 자존심에 또 한 번 름직한 스크래치를 남졌다. 독일은 우주에 사람을 내보내는데 천하의 미국은 아직도 로켓 문제로 씨름이나 하고 있다니 백악관도 자국민들의 푸념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맥아더는 하루가 멀다고 NASA에 전화를 결어 로켓 개발 현황에 대해 보고받았다. -언제까지고 우리만 뒤처질 수 없소.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말씀하시오. 내 사비라도 털어서 지원해 졸 터이니. 독일의 로켓 개발을 따라가기 위해 미국은 막대한 자...

Nevertheless, the world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3) > 식민지로 네덜란드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해오다가 눈물겨운 투쟁 끝내 독립을 쟁취한 인도네시아. 그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카르노는 갓 독립한 신생국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며 나라를 안정화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다행히도 독일과 냉전에 들어간 미국은 하나라도 더 많은 국가를 자국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독일의 극동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도 적잖은 지원을 해줬다. 미국에서 생산된 식량으로 굶주린 인도네시아인들의 배를 채우고 미국의 공장들에서 만들어진 트럭이 인도네시아로 배달되어 인도네시아의 재건에 여러모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카르노도 이러한 미국에 접근해서 더 많은 지원을 타냈다. 이대로 쭉 간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테지만 본래 인간이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어지는 법. 인도네시아의 재건이 얼추 이루어지고, 지방에서 활개 치던 군벌들의 정리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수카르노는 영토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가 눈독을 들인 곳은 말레이시아의 사바와 사라왁. 그리고 뉴기니 섬 전체 포클랜드 제도를 욕심낸 아르헨티나가 어떤 꼴이 되는지 봤음에도 불구하고 수카르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즉시 미국의 경고장이 날아왔다. '허튼 수작질 부리지 마라! '국경을 넘는 즉시 자카르타에 폭탄이 떨어질 것' '원조 모두 끊겨서 국민들 기아로 죽는 꼴 보고 싶으면 각오해라.' 맥아더는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또 사고를 치려고 벼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짜증이 치밀었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백악관의 분노가 듬뿍 담긴 경고장을 받아 든 수카르노의 이마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를 어쩌지? 국민에겐 큰소리 떵떵 쳐놨는데. 수카르노는 틈만 나면 라디오 방송에 나와 사바, 사라왁과 뉴기니는 인도네시아가 되찾아야 할 영토라며 선동을 일삼았고 인도네시아 국민도 수카르노의 말에 동조해 영토 회복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앞에서 이빨 깔 때...

Nevertheless, The World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2) > 헝가리는 주변에 적이 많았다. 슬로바키아가 그랬고 루마니아가 그랬으며 우크라이나와도 영토 문제로 관계가 썩 좋지 못했다. 그래도 2차대전 동안 독일의 동맹으로 소련에 대항해 싸웠고 전쟁이 끝나고 국경 문제도 일단락되면서 영토 분쟁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같은 추축국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큰형님 독일의 강권도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세르비아와는 도저히 관계가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가 없었다. 세르비아 정부의 공식 주장은 아니지만, 세르비아인들은 헝가리가 자국 영토를 강탈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녔고 헝가리 역시 아직 세르비아에서 받아올 영토가 많이 남아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헝가리 민족주의자인 호르티의 눈에 세르비아는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툭하면 분쟁이나 일으키는 건달패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는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할 때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세르비아의 추축국, 유럽연합 가입에 반대했다. 세르비아가 혼란에 빠지자, 호르티는 흥분했다. 그에게 이번 사태는 눈엣가시 같은 세르비아를 다시 손봐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히틀러와 만난 자리에서 호르티는 자신의 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세르비아는 예로부터 갱생이 불가능한 종자들이라 채찍과 몽둥이를 사용해야만 겨우 길들일 수 있다. 세르비아가 다시는 분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이번에 아주 철저하게 짓밟아줄 필요가 있다. "지금 세르비아 영토는 놈들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넓습니다. 이번 기회에 여러 갈래로 찢어놓는 것이 어떠신지?" 호르티는 히틀러에게 세르비아의 분할을 제안했다. 수도 베오그라드와 그 주변 땅덩어리만 남겨두고 조각조각 나눠서 일부는 합병하고 일부는 괴뢰국으로 만들어 세르비아인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자. 세르비아인들이 서로 뭉치지 못하게끔 뒤에서 조종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게 내버려 둔다면, 유럽은 50년이고 100년이고 영원토록 평화로울 것이다. 헝가리와 영토 문제로 감정이 그렇게 좋지 않은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