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acy of the Empire part 11
<제국의 유산 (11) >
프랑스 공산당은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위기에 몰려 있었다.
믿었던 소련은 처참하게 망해버렸고 유럽 대륙 전체가 독일에 점령당했다.
소련의 선전을 기대하며, 언젠가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넘어 파리에까지 밀어닥치리라 믿었던 프랑스 공산당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우랄산맥 너머로 밀려난 소련은 복수는 고사하고 언제 독일이 재침공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바빴다.
소련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 공산당은 절망했다. 소련 하나만 믿고 무력투쟁을 이어오다가 소련이 완전히 망해버렸으니, 이제 프랑스를 해방하는 것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일부 조직원들은 공산당에서 서서히 발을 빼려고 했다. 하루가 멀다고 연락이 끊긴 동지들이 빠르게 늘었다.
경찰이나 국가헌병대에게 체포된 것인지 더는 가망이 없음을 알고 이제부터라도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인지 당사자들에게서 직접 듣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후우..…..… 빌어먹을."
프랑스 공산당의 이인자 자크 뒤클로는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줄담배를 피웠다.
소련에서 오는 지원은 끊어진 지 오래고, 유럽 대륙은 하켄크로이츠의 물결에 뒤덮였다. 그중에서도 독일과 맞닿아 있는 프랑스는 히틀러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상태. 연락이 두절되는 조직원들은 늘고 있고 남아있는 당원들조차 흔들리는 상황.
2차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산당 당수 모리스 토레즈는 뒤클로에게 당을 맡기고 자신은 모스크바로 도망쳤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소련 영토로 진군하자 토레즈는 우랄산맥 너머 시베리아로 도망쳤고, 지금도 소련에 있었다.
토레즈는 희망을 잃지 말고 끝까지 파쇼들에 맞서 투쟁하라고 지시했지만, 저 혼자 안전한 소련에서 머물며 호의호식하는 그의 말에 더 이상 귀 기울이는 당원들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군부 내에 심어둔 첩자로부터 프랑스군 내부의 은밀한 움직임에 대해 알게 되었다.
현 정부의 방침에 불만을 가진 장교들의 모임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낸 뒤클로는 곧장 그들에게 사자를 보냈다.
함께 힘을 합쳐 프랑스를 구하자고.
“그놈들은 반독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반공주의자들이기도 합니다. 동지.”
“알고 있네."
“언제 우리 뒤통수를 때릴지 모르는 인간들입니다. 그런 자들과 손을 잡자고요?”
“너무 위험합니다. 차라리 다른 수단을-”
“다른 수단이 뭐가 있나?”
뒤클로의 물음에 군부 내 소장파들과 손을 잡는 것에 반대하던 간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까놓고 말해서, 프랑스 공산당에게 군부 소장파들과 손을 잡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어느 누가 그들과 손을 잡으려 한단 말인가? 저 멀리 아시아에 있는 소련이? 아니면 이탈리아의 동지들이?
이탈리아 공산당은 프랑스의 동지들보다 사정이 훨 나은 편이었지만 이탈리아 땅에서 활동하기 바쁜 그들이 프랑스에 와서 그들의 봉기를 도와줄 가능성은 희박했다.
결국, 그들이 손을 잡을 수 있는 대상은 같은 프랑스인들이 유일했다. 성향은 비록 반대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목표 역시 같다.
“저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걸세. 하지만 우리와 손을 잡기로 했지. 이후의 일들은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고, 우선은 프랑스를 파쇼들로부터 구하는 것만 생각하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동지.”
***
프랑스 공산당에는 부족한 무력을 군부 소장파들의 병력이 해결하고, 반대로 군부 소장파들에게 부족한 대중의 지지를 프랑스 공산당이 끌어낸다.
사자를 통해 의견을 교환한 지로와 뒤클로는 각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정해 분담하기로 했다.
“이래서야 우리만 X뺑이치고, 공은 빨갱이들이 죄다 독식하는 거 아닙니까?”
“저 꼰대 새끼들하고 손을 잡아야 하다니………… 참나.”
어쩔 수 없이 협력하면서도 서로 간의 앙금이 남아있는 탓에 두 조직의 결합은 대단히 껄끄러웠지만, 조직의 수장들은 내부의 우려와 반발을 찍어눌렀다.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선 악감정은 잠시 접어둘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은 거사에 집중해야 한다.
프랑스 해방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오월동주하게 된 그들은 세부적인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 그곳은 프랑스를 움직이는 머리이자, 프랑스라는 육체에 피를 공급하는 심장과도 같았다.
파리를 점령하면 프랑스의 모든 것이 멈추게 된다.
그랬기에 프랑스는 1940년에 파리가 함락되자 항전을 포기하고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5년이 지난 지금도 다르지 않다.
파리에 점조직처럼 퍼진 공산당과 레지스탕스들이 파리 일대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킨다.
이를 군부가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파리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봉쇄하고 정부 고위 각료들을 붙잡아 처형한 뒤, 레지스탕스의 테러로 위장한다.
“꼴 보기 싫은 보슈 놈들도 몇 놈쯤은 비슷한 방법으로 처리하지.”
"찬성입니다."
그렇게 공석이 된 주요 요직들을 장악하고 새 내각을 발표한다.
“독일이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의심하겠지.”
뒤클로의 질문에 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클로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말했다.
“당장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한동안은 놈들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를 거요. 물론 뒤로는 프랑스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움직일 거고.” 말을 멈춘 지로는 헛기침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최근 기침이 잦아졌다.
기침을 멈춘 그는 하려던 말을 마저 꺼냈다.
“그리고 식민지에 대한 대우도 예전으로 되돌려야지.”
프랑스 국민이 내는 혈세로 하등한 검둥이들을 돕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
지로는 거사가 성공하면, 이 모든 것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릴 생각이었다.
지로의 말에 뒤클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러면 식민지에서 강력한 반발이 터져 나올 겁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그 대신에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지. 공산주의자인 당신도 그 부분을 알고 있지 않소?”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조국 프랑스가 구시대의 유산인 식민제국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믿는 뒤클로는 지로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구상에 더는 간섭하지 않았다. 지로의 말대로 프랑스 국민 대다수는 이 같은 조치를 반길 것이다.
비단 프랑스 본토의 국민뿐만 아니라 알제리, 모로코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피에 누아르(Pied-Noir)들도 새 내각의 정책을 강력히 지지할 것이다.
우선은 거사에 성공하는 것만 생각하도록 하자. 식민지는 어디까지나 거사가 성공한 이후에 생각할 문제다.
“알겠습니다.”
“얘기가 통해서 좋군.”
“페탱 원수는 어떻게 할 방침입니까?”
“거사가 성공하려면 원수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비록 지금은 예전의 총기를 잃었지만, 아직도 그를 존경하는 프랑스인들이 많으니 말이오.” 거사가 성공하더라도 페탱은 한동안 직위를 유지할 예정이었다.
그를 끌어내렸다간 즉각 독일이 움직일 게 뻔한 데다 그를 지지하는 프랑스 국민의 반발로 기껏 성공한 거사가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었다.
대신 그가 가진 권한 대부분은 회수할 예정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프랑스를 바꿀 수 없을 테니까.
시간이 지나서 페탱에게 나이를 이유로 은퇴를 종용하고 그가 권좌에서 내려오면 마지막 남은 권한까지 모두 흡수해 대대적인 개혁에 들어간다.
독일이 훼방을 놓을 우려가 있지만, 전 프랑스 국민이 일치단결해 저항의 뜻을 밝힌다면 독일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최대한 타협을 보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그렇게 독일과 맺은 각종 불평등 조약들을 재협상하여 프랑스의 권리를 되찾는다.
독일의 점령하에 있는 나라들도 프랑스의 사례에 자극을 받고 독일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고 그때를 노려 미국과 연대해 반독을 가치를 높게 든다면, 독일의 유럽 지배를 뒤흔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계획이 모두 세워졌으니 마지막 단계인 거사일을 언제로 하느냐만 남았다.
“언제로 하는 게 좋겠소?”
“11월 11일이 어떻겠습니까?”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
2차대전보다 1차대전 때 더 많은 희생을 치뤘던 프랑스에 11월 11일은 여러 의미를 지닌 날이었다. 뒤클로의 뜻을 알아챈 지로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날이 좋겠군.”
“위대한 프랑스를 위해 건배하도록 하지요.”
거사일이 정해지자 잔에 와인이 채워졌다. 지로와 뒤클로는 손에 든 잔을 들어 보이며 경건한 목소리로 외쳤다.
비바 프랑스라고.
거사 계획은 곧 공산당 계열 레지스탕스들의 하부 조직들에게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직원이 거사 자체만 알고 있을 뿐 거사일이 몇 월 며칠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이들 중 조직 내에서 나름의 직위를 가진 이들은 거사일이 언제인지 알고 있었다.
말단 조직원이나 일개 병사는 몰라도 상관이 없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내다 버리는 장기말이지 수뇌부가 아니니까.
하지만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고 병력을 움직이며 각종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이들이 몰라선 안 됐다. 그러면 계획 자체를 세울 수 없으니.
“11월 11일입니까?"
“그렇네, 소령.”
자크 드뷔옹 소령도 그랬다. 신임 대대장인 그는 자신의 직급 덕에 거사일이 언제인지 전달받는 것이 허용되었다.
“명심하게. 이 사실이 새어나가면 거사는 실패야. 나도, 자네도 끝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밤이 깊었군. 얼른 가게. 자네대로 이제 할 일이 생겼으니.”
“예, 대령님.”
그 대가로 그는 밤을 새워서 작전의 세부 계획을 짜고, 휘하 장교들과 병력이 거사 당일까지 의심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아야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이 자리에서 하는 일이 주로 그런 것들이었으니.
사람들은 몰랐지만, 지금의 이 자리에 오기까지 드뷔옹은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알자스인 아버지와 모로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드뷔옹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었지만, 드뷔옹의 또래들은 그를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드뷔옹은 프랑스어를 하는 보슈와 아랍인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에 불과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 잡종 새끼야."
“야, 우냐? 울어???
“프랑스어 쓰지 마. 독일어로 말하라니까. 아니면 아랍어를 쓰던가.”
드뷔응이 나이를 먹은 후에도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관학교로 진학한 후에도 그는 자신의 출신 때문에 동기들 사이에서 겉도는 존재였다.
드뷔옹은 억울했다. 자신은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어를 쓰며 프랑스에 충성하는데 어째서 이들은 나를 프랑스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가?
그는 출세를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지금의 위치에서 벗어나겠다는 각오로 악착같이 산 결과 그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소령 계급장을 달아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을 누리게 됐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드뷔옹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보다 높은 계급, 높은 직위를 원했다. 지금껏 그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고난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듯이.
그는 진급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 남들에게 무시 받지 않는 자리에서 그치지 않고 남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들의 인생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를 원했다.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선 어떤 짓도 할 각오가 있었다.
“소령님. 외출하십니까??
“오늘따라 밖에서 마시는 술이 땡겨서 말이지.”
“즐거운 시간 되십쇼.."
관사를 나온 드뷔옹은 평소 자주 가는 비스트로(Bistro. 레스토랑보다는 가격이 저렴한 작은 식당)로 향했다.
‘나이 든 암탉’이라고 적힌 간판 밑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평소처럼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한 잔의 와인과 안주로 먹을 굴 한 접시를 주문했다.
화이트 와인을 홀짝이며 비린 굴을 천천히 까서 먹고 있는데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눌러 쓴 남자가 들어왔다.
주인장에게 와인 한 병과 이 가게에서 가장 잘하는 요리를 주문한 남자는 드뷔옹을 보고 아는 체했다.
“여기서 다 만나는군.”
“잘 지냈나?”
“나야 그럭저럭이지. 요즘 뭘 하고 지내나?”
드뷔옹은 남자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다.
“이런. 담배가 없군. 한 개비만 주게.”
남자가 담배를 청하자 드뷔옹은 한 갑을 통째로 넘겨줬다.
“한 개비만 있으면 되는데?”
“다 가져가. 전에 자네에게 빌린 돈 대신이니.”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도박 좀 적당히 하게.”
와인과 굴을 해치운 드뷔옹은 먼저 가게를 나섰고, 남자도 자신이 주문한 와인과 요리를 모두 해치운 후에 가게를 나섰다.
본부로 돌아온 게슈타포 요원은 담뱃갑을 꺼내 안에 든 담배들을 쏟아냈다. 각각의 담배에는 번호가 적혀 있었고, 깨알 같은 글씨로 각종 기밀 사항들이 적혀 있었다.
게슈타포 요원은 상관에게 거사일이 11월 11일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해당 사실은 보고서로 작성되어 여러 경로를 거쳐 프린츠 알브레히트 가의 게슈타포 본부로 보내졌다.
독일과 유럽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셸렌베르크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프랑스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에 관한 보고서를 읽어내려갔다.
보고서를 읽는 동안 그의 입에선 중간중간 실소가 터져 나왔다.
“멍청한 개구리 새끼들. 이렇게야 현실 파악이 안 돼서야 원..”
아직도 상황파악이 덜된 프랑스인들의 작태에 셸렌베르크는 혀를 내둘렀다. 멍청한 놈들이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이야.
너무 멍청해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놈들은 정말로 자신들의 계획이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 건가?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만슈타인 원수가 세운 전략이 보통 획기적인 게 아니어야 말이지. 그런데 전쟁도 다 끝난 마당에 다시 1940년 이전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니.
어지간히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떠올릴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렇게 싸우고 싶었다면 드골을 따라서 캐나다로 도망쳤어야지. 이제 와서 거사니 뭐니 하는 꼬라지들하고는.
감상을 마친 셸렌베르크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게슈타포 본부 내에서 유일하게 총통 집무실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화였다.
“총통 각하, 접니다. 보고 드려야 할 게 생겨서 말입니다. 언제가 괜찮으실지………… 아, 예, 지금 가겠습니다. 하일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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