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Clouds part 6
<먹구름 (6) >
카윰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아, 여기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그의 모습에 감탄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뿐이니 오해는 하지 말도록.
그래도 남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도 내 인상에 적잖이 영향을 줬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군.
카윰과 함께 관저로 초대된 투르키스탄 통일위원회의 구성원들-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도 대체로 우리 측의 요구사항을 거의 다 수용했다. 애초에 독일에 살면서 독일 돈으로 밥 먹고 옷 입고 침대에서 자는 처지라 그들이 우리의 요구를 거부할 리가 없었다.
샤흐트는 아직 소련을 공격한 것도 아닌데 벌써 조약을 체결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냐며 툴툴거렸지만, 막상 회담이 끝난 뒤에는 대단히 만족한 모습이었다.
“거, 나한테 설레발 치는 거 아니냐고 핀잔줄 때는 언제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오??
“아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냥 제 기분이 좋아서 그런 것이니까요. 이번 일과는 무관합니다.”
예, 예. 참 어련하시겠습니다.
사실상 헐값에 중앙아시아에 널린 각종 자원을 들여올 수 있다는 사실에 샤흐트는 입꼬리가 승천할 지경이었다.
동석했던 풍크가 나중에 투르키스탄인들에게 욕 좀 먹겠다고 말하자 샤흐트는 그럴 리 없다고 말을 잘랐다.
“우리는 우리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저들의 독립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줬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조금 가져가는 것일 뿐이네. 그렇지 않습니까?”
“암. 그렇고말고. 조금 빨대야 꽂겠지만 그들 몫은 남겨놓을 것이니 후대에 욕먹을 걱정은 하지 마시오. 그렇게 따지자면 폴란드인들과 체코인들은 우릴 얼마나 욕하고 있겠나?”
중앙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할 회담이 끝나고 이번에는 구데리안과 독대하여 현재 진행 중인 전차 개발 및 생산 현황에 대해 보고받았다.
티거는 올해 연말까지 생산하고 내년 1월부터 중단할 예정이었지만 지난달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티거보다 고성능의 전차들이 쏟아져나온 마당에 굳이 티거를 연말까지 계속 생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이미 생산된 수량만으로도 충분하기도 하고.
105mm 68구경장 전차포에 판터 II에 달린 것과 같은 스테레오 거리측정기가 장착된 6호 전차 C형 티거 III의 생산도 안정적으로 진행 중이다.
88mm보다 큰 105mm라 포탄을 많이 적재할 수 없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105mm 주포의 화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2km에서 190mm를 관통하고 1km에서 210mm, 100m에서 250mm라. 사실상 관통할 수 없는 전차가 없겠군.”
경심철갑탄의 경우 105mm보다 128mm가 더 높게 나오지만, 일반 철갑탄으로 한정하면 105mm도 128mm에 필적했다.
포탄을 39발밖에 못 싣는 게 흠이지만 부족한 수량만큼 전차들을 더 많이 찍어내서 커버하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88/71을 사용하는 판터 II랑 티거 II도 있으니.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소련은 퇴각하면서 자국 내 공장들을 뜯어 후방으로 가져가거나 혹은 적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폭파했지만, 그런데도 상당한 숫자의 공장들이 추축군에 넘어갔다.
이 중에는 무기공장들도 있었는데 이들 공장에서 생산되는 ‘소련제 무기’는 신생 독립국 군대들의 무장을 책임졌다.
아돌프스부르크(레닌그라드)의 공장에서는 기관단총과 박격포, 하르코프와 히틀러부르크(스탈린그라드)에서는 T-34가 생산되어 자유 러시아군, 우크라이나군에게 보내졌다.
전후 서유럽이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나토군 체제로 기본적인 무장을 획일화하여 효율성을 올린 것처럼, 이들 군대의 무기체계를 점진적으로 독일제 장비들로 대체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아직은 소련제 장비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기존의 공장들을 전부 뜯어고치고 무장을 통일하려면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의 독일엔 그럴 비용도,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 한들 소련이 남기고 간 공장들에서 생산되는 물량만으론 자유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이 필요로 하는 전체 물량을 맞추기엔 살짝 빠듯했기에 독일군이 사용하는 장비들을 자유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에게도 일부나마 공여했다. 소총, 기관총 등 소화기는 충분하니 전차, 장갑차, 전투기 등 중장비 위주로.
동시에 영국에 전개했던 국방군 병력도 동유럽으로 은밀히 배치되는 작업 역시 진행 중이다.
소련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로 밤에 화물용 열차에 병력을 실어 동유럽으로 보냈다.
병사들에게도 목적지를 비밀로 했고 기밀 엄수를 위해 무전사용도 최대한 자제하게끔 지시했다. 유럽의 운명을 결정지을 최후의 전쟁이 될지 모르니만큼 한치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
1943년 11월 14일
영국 버크셔 윈저 성
대소전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나는 짬을 내 영국으로 날아갔다.
영국을 상징하는, 특히 왕실을 상징하는 대부분의 랜드마크들이 리히트호펜의 주장으로 개박살이 난 상태였지만 격전의 와중에도 무사히 살아남은 건물들도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윈저 성이었다.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최초로 지은 윈저 성을 엘리자베스 2세가 특히나 매우 좋아했는데, 얼마나 좋아했냐면 버킹엄 궁전은 업무용 거처로 여기지만, 윈저 성과 영국 왕실의 여름 별장인 밸모럴 성은 자신의 진짜 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92년 윈저 성이 화재로 전소되었을 때, 각계의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2세는 3700만 파운드, 한화로 548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들여 총 5년에 걸쳐 윈저 성을 복원했다.
천문학적인 비용의 충당을 위해 왕실 면세 혜택을 포기하고 버킹엄 궁전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헌데 브리튼 섬 본토는 우리가 먹었고 엘리자베스 2세는 캐나다에 있으니 3차 세계대전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그녀가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아마도 없을 듯했다.
설명이 걸어졌군. 아무튼, 버킹엄 궁전을 비롯한 주요 건물들이 죄다 박살이 난 관계로 이곳 윈저 성은 한동안-어쩌면 거의 영원히-영국 국왕의 거처로서 작용하게 될 예정이었다.
새 영국 국왕직은 바하마에서 돌아온 윈저 공이 맡게 되었다.
7년 만에 다시 영국 국왕이 된 에드워드 8세와 정식으로 영국의 왕비가 된 윌리스 심프슨-이젠 윌리스 왕비라 불러야 한다-을 축하하기 위해 BUF와 독일의 고위층 인사들이 윈저 성에 모였다.
“다시 영국의 국왕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고맙습니다. 총통. 이게 다 총통과 독일 국민의 도움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에드워드 8세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왕비 전하도 축하드립니다.”
왕비가 된 심프슨도 행복해 보였다.
에드워드 8세가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 국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던 날, 그녀는 대성통곡을 했다지. 자신이 영국의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해서. 그렇다고 새 남편과의 관계가 식은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왕비가 되는 것을 꿈꿔왔던 그녀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이었을 것이다.
과정과 모양새가 아주 이상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간에 그토록 원하던 왕비가 됐으니, 그녀는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비록 독일 괴뢰국의 얼굴마담 역할에 지나지 않으나 표면상으로라도 꿈에도 그리던 왕비가 됐으니 오죽할까.
어차피 바하마에 그대로 있어봤자 변할 게 없으니, 비록 독일의 꼭두각시 신세라곤 해도 엄연한 한 나라의 국왕과 왕비로 있는 게 이들 부부에게는 더 나은 일일 것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캐나다에 있는 메리 왕대비와 엘리자베스 2세는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이 독일에 점령당한 고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둘이 언제는 그런 걸 신경이나 쓸 위인들이던가.
물론 이들도 보는 눈을 의식해 바로 영국으로 오지는 않았다.
대신 순방 명목하에 포르투갈을 방문했고,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갔다.
스페인-프랑스를 통해 영국으로 온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은 순방에 함께 한 인원들과 함께 그대로 영국에 도착해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밝혔다.
당연히 캐나다에 있는 왕실은 한바탕 뒤집혔다.
에드워드 8세는 영국의 전 국왕이자 메리 왕대비의 아들이고, 엘리자베스 2세에겐 삼촌이기도 하니 차마 에드워드 8세에게는 뭐라고 하지 못하고 바하마 총독부 관료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는데, 관료들은 전 국왕이자 현 총독이 순방이라는 명목으로 외국 을 가는 것을 자신들이 어떻게 막느냐만 반발했다고 한다.
심지어 바하마인들만 차별한다는 소문까지 돌아 바하마의 민심이 곤두박질치기까지 하자 놀란 영국 왕실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급히 해명까지 해야 했다.
본토는 점령당했고, 인도에서의 무력투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바하마까지 난리가 날 경우, 식민지 전체로 불똥이 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때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를 다스렸던 왕실이 이제는 식민지 흑인들을 달래기 위해 벌벌 떠는 모습이라니.
영국 왕실의 권위가 어디까지 추락했는지 알만했다.
에드워드 8세가 나와 만나는 광경은 영국인들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희석해줄 것이었다.
적군이 아닌 자기네 공군이 자기네 국왕과 왕비를 죽였다는 사실-실제론 우리가 죽였지만-도 여전히 충격인데, 전 국왕이 돌아와서 이제는 증오가 아니라 화해와 공존을 모색할 때라고 말한다면?
어지간한 영국인들이라면 더 이상 싸울 생각은 하지 않을 거다.
미국도 손절치고 나간 마당에 저항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영국에 주둔하며 질서를 잡기보단 혼란만 일으킨 덴마크군과 노르웨이군은 자유 러시아로 소환했고, 그 자리에 핀란드군을 채워 넣었다.
핀란드는 대영전에 참전하지 않았지만, 질서유지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것에는 동의하여 병력을 파견해주었다.
유럽 전역이 우리 수중에 떨어진 이상, 계속 독일과 멋쩍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국익에 좋지 않다고 판단했겠지. 영국 파병안을 순순히 들어준 대가로 나는 핀란드가 요청한 판터, 티거의 판매를 허락했다.
핀란드가 고분고분해진 것과 달리 프랑스와 스페인은 최근 우는 소리가 부쩍 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식민지 때문. 알다시피 나는 스페인에 참전 명목으로 영국령 서인도 제도를, 프랑스엔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약속했다.
영국 본토도 먹었고, 미국과 강화도 했으니 이제 자기들 몫의 배당금을 챙길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스페인은 저 멀리 아메리카 대륙까지 갈 방법이 없었고 영국령 아프리카 식민지들은 영국에 세워진 새 정부가 아닌 캐나다의 영국 망명정부에 충성했다.
제아무리 본진이 털렸다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아프리카 주둔 영국군만으로도 프랑스 식민지군 정도는 충분히 격퇴하고도 남았다.
식민지 국경을 넘어 진격하던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반격에 죄다 격퇴당했고, 아프리카 전역이 추축국에 장악되는 일을 피하고 싶었던 미국도 아프리카 식민지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니, 우리더러 도와달라는 건가?”
연회를 앞두고 잠시 쉬는 시간 동안 나는 리벤트로프로부터 그간의 사정에 대해 청취했다. 리벤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 때문인지 직접적인 지원 요청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영국군을 이대로 놔두면 독일의 지배에도 영향이 가지 않겠느냐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게 그거지. 프랑스 친구들 참.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군.”
“어찌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일일이 수저로 밥을 떠먹여 줘야 하나? 그릇에 밥을 퍼줬으면, 밥은 알아서 먹어야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리벤트로프도 스페인과 프랑스를 위해 머나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까지 국방군을 보낼 생각이 없었기에 내 말에 적극 동의했다.
당장 소련을 공격할 준비만으로도 바쁘지만, 굳이 소련이 아니더라도 그놈의 식민지를 위해 애꿎은 우리 병사들을 피 흘리게 할 생각은 없었다.
빠르면 5년이나 10년, 늦어도 20년 안에 아프리카인들이 독립시켜 달라고 들고 일어설 텐데 뭐 하러?
아프리카의 자원이야 늘 탐이 나지만, 굳이 식민지로 만들 필요 없이 독립한 국가들과 무역을 해서 들여오는 게 더 싸게 먹히는데?
그리고 미국이 미쳤다고 자기네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서인도 제도를 추축국에 넘겨주겠냐.
프랑코도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본인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차마 우리에게 서인도 제도 먹게 병력 지원 좀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스페인군만으론 대서양에 진을 치고 있는 영국 해군을 돌파할 수 없다며 그저 징징대기만 할 뿐.
결과만 놓고 보면 페탱과 프랑코는 나한테 사기당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이 있으면 내가 건넨 제안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진작에 간파했을 텐데 본인들이 좋다고 덥석 물었으니 자기들 팔자지.
그러고 보니 이 둘이 스승과 제자 관계이니 사제가 쌍으로 같은 사람한테 사기당한 셈이군. 하하하.
***
독소전이 한창일 동안에도 평온했던 중앙아시아에는 최근 극도의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알라 아크바르!"
“독립 만세!"
“신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에게 죽음을!”
독소전 기간 동안 많은 중앙아시아인이 소련군에 징집되어 전장으로 보내졌다. 그들 중 상당수는 돌아오지 못했다.
기껏 돌아오더라도 팔다리가 하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 적에게 항복했다는 이유로 당사자의 가족들이 피를 보는 사례도 있었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공산당에 하나뿐인 남편, 아들, 형제를 보냈는데 돌아온 것은 보답이 아닌 더욱 심해진 억압의 사슬과 피의 숙청이었다.
10여 년 전 공산당의 거침없는 탄압과 숙청으로 겁에 질려 지내던 중앙아시아인들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마침 시베리아에서 일어난 쿨리크의 반란 소식이 그들의 저항심에 불을 질렀다.
중앙아시아인들은 소련군의 철로와 다리에 폭탄을 설치하고 지역 사무소를 습격해 경찰들을 죽이고 무기를 빼앗았다.
동네마다 있는 정치지도원들과 이웃들을 감시하고 경찰과 지역 당에 고발을 일삼던 앞잡이들은 목이 잘려 거리를 굴러다녔다.
자유 러시아와 이란을 통해 수송기 편으로 소련에 잠입한 동방부대의 장병들도 반소 게릴라에 합류, 그들에게 무기와 전술을 전수하고 사람들을 선동하며 공산당에 대한 저항을 주도했다. 인도에서 활약한 MP3008이 소련군을 향해 불을 뿜었다.
붉은 군대에 입대한 중앙아시아인들이 무기를 들고 탈영해 게릴라에 합류하는 경우가 늘자 쿠이비셰프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중앙아시아인 병사들을 자유 러시아 국경과 머나먼 극동으로 보내고 중앙아시아의 반소 게릴라에 합류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적은 러시아인들을 중앙아시아로 보내 게릴라들을 상대하게 한 것이다. 소련군은 이제 자기네 영토에서조차 안심할 수 없게 되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농부가 자신들의 뒤에서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지고 도망칠지 누가 알겠는가.
물이 든 항아리를 나르는 아낙들과 소녀들은? 담배를 피우는 노인들은 또 어떻고?
시베리아의 반란이 곧 진압될 것이라는 당국의 선전도 그들에게는 아무 용기도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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