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Clouds part 3

 < 먹구름 (3) >

독일과 이전의 악연을 청산하고 함께 영미를 공략하기를 바랐던 일본의 희망은 망상으로 끝났다.

히틀러는 일본을 도와 미국과 전쟁을 이어나갈 생각이 없었고, 미국 정복이라는 망상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독일이 미국과 강화하고, 미국이 태평양에 전력을 집중하자 일본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영국은 독일에 의해 몰락했지만, 태평양 방면에서 가해지는 미국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유럽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본 미국은 대일전의 승리로 대독전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했다.

영국에 배치될 예정이었던 병력과 그 병사들에게 배급될 식량, 병사들이 사용할 연료, 탄약, 무기, 차량, 항공기가 태평양에 집중적으로 배치되면서 겨우겨우 버티기 바빴던 일본군의 전선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버마 방면의 미군, 국민혁명군, 그리고 소수의 영국군과 인도군은 대공세를 펼쳐 버마에서 일본군을 몰아냈다.

버마에서 쫓겨난 일본군은 태국으로 퇴각해야 했다.

일본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영미에 선전포고한 태국은 경악했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아시아와 태평양을 집어삼키며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고 꺼드럭거릴 때는 언제고 지금은 연합군의 입김 한 번에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꼴이라니! 버마에서 발진한 미국의 B-17은 이제 태국의 도시들과 태국에 자리한 일본군의 비행장을 거리낌 없이 폭격했다.

놀란 태국 정부는 비밀리에 미국과 접촉해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해명했다.

일본과 협력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태국 정부는 결코 미국을 적대할 생각이 없다고.

그리고 기회만 된다면 일본에 맞선 연합군의 대열에 합류할 의사가 있다고 말이다.

미국은 태국 정부의 박쥐 짓에 조소했지만 그렇다고 태국의 협력 제안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의 목표는 도쿄에 성조기를 꽂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지 태국이 아니었으니까.

태국이 일본을 향해 알아서 총부리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태국의 대미 선전포고는 충분히 용서할 수 있었다.

버마를 탈환함에 따라 중국은 미국의 랜드리스 물자를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국민혁명군은 전체 병력의 70% 이상이 미제 장비로 통일을 완료했으며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버마와 중국에 이어 사이판과 필리핀에도 미군이 들이닥쳤다.

일본군은 자국 영토 방어에 필수적인 절대방위선 사수를 위해 병사들에게 옥쇄를 강요했고 자살공격 전술인 카미카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미친놈들. 자살공격이라니.”

“도대체 저놈들 대가리엔 뭐가 든 거지?”

“알 게 뭐야. 죽어도 항복하기는 싫다. 이거겠지. 개씨발놈들.”

다짜고짜 함선을 향해 달려들다가 대공포를 맞고 공중에서 산화하거나 함선과 충돌해 제 한 몸을 조각내는 제로센을 보며 미군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직감했다. 자신들이 싸우는 상대가 보통 미친놈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다고 미군이 겁을 먹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상대를 향한 적개심만 더욱 늘어났을 뿐.

그리고 또 하나, 적들이 이런 미치광이나 다름없는 전술을 쓸 정도로 적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다고 미군은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적들이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자살공격이라는 카드까지 꺼내 들겠는가?

이는 전쟁의 끝이 다다랐다는 것.

승리가 멀지 않았다. 이 한마디에 미군들은 더욱 정열적으로 싸웠다. 일본이 항복해야만 그들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기에.

일본군이 악착같이 저항해도 그들과 싸우는 미군의 전투 의지 또한 나날이 올라갔다. 중전이 가까워질수록 양측의 전투는 더욱 치열하고 더욱 거세어졌다.

이렇듯 태평양에서의 싸움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전혀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피바람의 전조가 불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물은 인물은

1943년 10월 24일

소련 쿠이비셰프

티모셴코를 시작으로 육군과 공군, 해군의 수많은 장교를, 스탈린은 제 손으로 목을 쳤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반소 게릴라들 역시 붉은 군대를 동원해 적극적으로 토벌 중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여전히 불안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자신을 끌어내릴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미 손에 수많은 이들의 피를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갈증은 여전했다.

지금도 그는 충분히 많은 이들을 죽이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공포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다른 이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그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두려움을 잊으려면 더 많은 피가 필요했다.

평소 의심의 대상이거나 행동이 수상쩍은 기색이 있던 자들은 모두 죽었거나 NKVD의 지하고문실에 갇혀 심문받고 있었다.

스탈린은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서 명단을 뒤졌다.

이름이 좀처럼 알려진 장군 중에도 독일과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된 이들만 살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명단에 적힌 이름을 읽어 내려가던 스탈린의 눈이 특정 이름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리 쿨리크.

스탈린의 신임을 받던 남자.

독소전쟁 초기, 많고 많은 장군 중에서 유일하게 전과라고 부를 수 있는 전과를 냈던 그는 지금 시베리아에 있었다.

스탈린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쿨리크. 공을 세운 건 사실이긴 하나 그가 내린 지시는 결과적으로 소련군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남겼다.

쿨리크가 기관단총을 총알이나 낭비하는 경찰용 무기라며 멸시했을 때 독일군은 돌격소총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쿨리크가 전폭적으로 밀었던 T-43은 T-34보다 문제가 더 많은 애물단지라는 것이 실전에서 밝혀졌다. 인간백정은 쿨리크를 싫어하지 않았다.

쿨리크는 스탈린에게 충성을 바쳤고-숙청된 티모셴코도 스탈린에겐 충성적이었지만-스탈린의 지시에 토 다는 법이 없었다.

그는 우직한 일꾼처럼 스탈린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다.

실제로도 그는 전쟁에서 어느 정도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동시에 엄청난 실책을 저질러 소련군 전체의 피해가 커지는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물론 쿨리크의 건의를 승인하고 전군에 명령한 것은 스탈린 본인이었지만, 독재자는 본래 책임을 지지 않는 법.

책임을 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밑에 있는 부속품들이었다.

스탈린은 수화기를 들었다.

“크루글로프를 호출하게.”

30분 뒤 크루글로프는 스탈린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크루글로프는 더 이상 부르셨습니까 혹은 무슨 일이 생기셨냐는 등의 말들을 하지 않았다.

오늘도 불쌍한 누군가의 인생이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만 들 뿐.

“쿨리크를 소환하게.”

스탈린의 다음 제물은 쿨리크로 낙점되었다.

******

1943년 10월 26일

소련 노보시비르스크

쿨리크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붉은 군대의 장교들이 매일같이 죽어 나가고 있는 와중에 그는 여전히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큰 행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쿨리크는 자신이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가 부상에서 회복하자마자 스탈린은 그를 시베리아에 보냈다.

처음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후방에서 요양이나 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스탈린은 그를 찾지 않았다. 쿨리크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서기장은 자신이 이곳에서 평생 썩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물론 숙청당하는 것보다야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평생토록 눈과 얼음을 보면서 사는 게 훨씬 나은 편이긴 하다.

하지만 쿨리크는 자신이 그토록 충성을 바쳤는데도 자신을 외면한 서기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빌어처먹을 조지아 촌놈 같으니. 쿨리크는 분노에 차 보드카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동지.”

쿨리크와 함께 술을 마시던 쿨리크의 부하 고르도프 상장이 말했다. 그 역시 쿨리크처럼 전쟁 도중에 시베리아로 보내져 여태까지 이곳에서 썩고 있었다.

“혹시 모른다니?”

“지금 소비에트 전역에서 피바람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곳에 계속 남아있는 게 안전할지도 모릅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고르도프만큼이나 쿨리크와 가까운 사이인 리발첸코 소장이 칼로 얇게 저민 살로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저희도 혹시 모르니 미리 준비해놓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떤 준비를 말하는 건가?”

“그야 뭐………… 최악의 경우 우리 목숨을 지킬 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리발첸코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말하는 준비가 무엇인지 눈치챈 쿨리크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오히려 그 준비 때문에 꼬투리를 잡힐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나?”

“동지. 병력의 훈련이라고 둘러대면 서기장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저희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훈련 외에 더 있겠습니까?”

만일을 대비해 필요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쿨리크는 생각이 많아졌다.

리발첸코의 말대로 만일을 대비할 겸 서기장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그는 군사훈련에만 열심인 척했다.

동시에 사령부 인근에 자신의 전용기를 배치했고 개인 경호병력들도 선정해 가까이에 두었다.

그리고 얼마 뒤,

리발첸코의 조언은 사실이 되었다. “동지! 동지!"

“NKVD입니다, 동지!”

쿨리크는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척을 하며 NKVD 요원들을 맞이했다.

스탈린의 사냥개들은 로봇에 사람의 살가죽만 씌워놓은 것마냥 무표정했고, 그들의 목소리와 말투에선 일말의 감정도 찾아낼 수 없었다.

“쿨리크 원수, 서기장 동지께서 당신을 쿠이비셰프로 부르셨소.”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이유는 가서 그분께 직접 들으시오.”

스탈린이 쿨리크에게 무언가 지시를 할 일이 있어 그를 부른 것이라면 NKVD가 이렇게 오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을 쿨리크는 알았다. 이는 십중팔구 자신의 숙청을 준비 중이라는 뜻일 터.

쿨리크는 티모셴코와 다른 장성들처럼 순순히 총살대로 걸어갈 생각이 없었다.

쿨리크가 손을 들어 신호를 내리자, 그의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병사들이 튀어나와 일제히 NKVD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제야 무감각하던 NKVD의 얼굴에 감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 이게 무슨……….”

“보면 모르나?”

이전의 오만한 말투는 온데간데없고 당황한 말투가 들리자 쿨리크는 조소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이건 반역이다! 서기장 동지와 인민의 뜻을 거역하는 거라고!”

“네놈이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

“쏴라.”

쿨리크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총구들이 불을 뿜었다.

세상 두려운 줄 모르고 날뛰며 ‘인민의 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불렸던 스탈린의 사냥개들은 벌집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것으로 이제 그는 일선을 넘었다. 이제 그가 다시는 스탈린과 독대할 일은 없을 것이다.

뭐, 이런 일이 없었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테지만.

바닥에 번져가는 피를 보며 쿨리크는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스탈린이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쿨리크는 스탈린 치하에서 결코 살 수 없었다.

남은 방법은 역시 하나뿐.

***

1943년 10월 27일

소련 쿠이비셰프

스탈린은 설계국에서 올린 신형 중전차의 개발에 대해 보고받고 있었다.

소련제 장비들을 압도하는 독일의 전쟁 병기들.

소련이 전쟁에서 패한 이유 중 하나인 만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스탈린은 무기 개발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독일의 재침공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는 설계국의 개발자들을 다그쳤다.

소련 전역에 재차 불고 있는 피바람도 좋은 기폭제였다. 개발자들은 서기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자신들도 숙청되지 않을까 불안해했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면, 하루라도 더 빨리 결과물을 보여야 한다.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일 내로 결과물이 나오자, 스탈린은 흡족해했다.

아직 나온 것은 설계도가 전부였지만, 이제까지의 진행속도로 봤을 때 올해가 끝나기 전까지 실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항공기 분야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굴라그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자신들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결과물로 증명해 보여라.

기술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형 기체를 연구했고 그 결과 Yak-3, La-7이라는 소련 입장에서는 주목할 만한 신형 전투기들이 완성되었다.

현재 두 기체는 시험이 한창이었는데, 시험에서 합격점을 받는 즉시 양산하기로 계획이 잡혀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났지만, 소련 내부의 분위기는 여전히 전시나 다름없었다.

다음 전쟁에서도 같은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일해야 한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해라.

게으름을 피우는 자는 조국이 같은 치욕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자들이고 그런 자들은 위대한 인민의 나라에서 살 권리가 없다.

퍽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보고서를 내려놓은 스탈린은 담배를 피우다 문득 사흘 전에 내린 지시가 떠올랐다.

그가 크루글로프를 호출하기 위해 전화기로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두꺼운 오크나무로 된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기장 동지? 급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들어오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스탈린은 크루글로프가 쿨리크를 잡아왔다고 보고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온 줄 알았다.

그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크루글로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고 스탈린은 무언가 일이 잘못된 것임을 직감했다.

“서기장 동지. 노보시비르스크로 간 체포조와 연락이 닿질 않습니다.”

“연락이 닿지 않는다니?”

“예정대로라면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와야 했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저희 쪽에서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습니다.”

“…………그자들이 탈영, 아니 증발이라도 했다는 소리인가?”

“아직 파악 중입니다. 비행기가 추락했을 수도 있기에 인근 부대에 연락을 넣고 있습니다.”

“마지막 교신은 언제였나?”

“체포조의 임무 중엔 교신하지 않습니다. 출발할 때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체포조가 표적을 체포했을 때 체포조로부터 연락이 오는 게 보통입니다만 여태껏 연락이 없습니다.” 악천후로 비행기가 추락하는 일은 1943년에 드문 일이 아니었다.

특히 항공기 관련 기술이 독일이나 영국, 미국보다 떨어지는 소련에서는 더더욱. 그랬기에 스탈린은 처음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쿨리크의 체포가 늦어지는 것뿐이었다.

쿨리크를 체포했다는 연락이 오지 않았으니 어쩌면 체포조를 태운 비행기가 도중에 추락했을 수도 있었다.

“지금 즉시 두 번째 체포조를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스탈린도, 크루글로프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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