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g of War part 4
<줄다리기 (4) >
1943년 7월 8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충격적인 소식.
루즈벨트가 죽었다.
역사보다 1년 9개월가량 빠른 죽음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루즈벨트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여기선 전국민적인 비난과 국내의 대혼란, 그리고 탄핵 직전까지 갔으니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무리가 갔을 터. 따라서 그가 역사보다 일찍 죽음을 맞이한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루즈벨트 개인에게는 지금 죽어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죽지 않고 살았다면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당한 대통령으로 남았을 테니까.
루즈벨트의 죽음이 발표되던 날, 괴벨스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경축드립니다. 총통 각하. 사탄이 죽었습니다.”
루즈벨트가 임기 중에 사망한 관계로 대통령 직위는 현 미국 부통령인 헨리 A. 윌리스에게 돌아갔다.
월리스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무섭게 국내 내부 문제의 진화에 나섰다.
흑인 민권에 관심이 많았던 윌리스는 대통령직 승계 당일 날에 성명문을 발표해 터스키기 매독 실험 사건 책임자들의 문책 및 처벌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그리고 시위 도중에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 나라는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아직도 일본군은 남태평양과 광활한 중국을 지배하며 항전을 부르짖고 있고 유럽에서는 우리의 동맹 영국이 독일의 침공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모든 다툼과 증오의 고리를 끊어내고 다시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외부의 적을 두고 우리 자신들끼리 싸워댄다면 게르니카와 난징, 바르샤바에서 벌어졌던 일이 시카고나 뉴욕에서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부디 국민 여러분께서는 정부를 믿 어주시길 바랍니다.”
한편, 괴링, 괴벨스, 힘러 등 내 측근들은 루즈벨트가 죽었으니 곧 미국이 협상을 요청해 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실책은 전임자인 루즈벨트 탓으로 돌리고 부담 없이 전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미국이 놓치겠느냐면서.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루즈벨트를 대신해 대통령이 된 윌리스는 친소파인 루즈벨트조차 너무 친소적이라면서 우려할 정도로 소련에 극도로 우호적인 인간.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을 동맹국 소련에 대한 배신행위라면서 맹비난했던 그가 소련과 일전을 치른 독일에 우호적일 리가 없었다.
제3국을 경유해 미국에 전달된 강화제안은 윌리스에 의해 단칼에 거부되었다.
나는 윌리스에게 상호 간의 선전포고 취소 및 정상회담 추진을 제안했지만, 윌리스는 독일군이 브리튼 섬에서 완전히 철수하기 전까지는 어떤 제안에도 응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허, 미친놈들. 아직도 자기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군.”
“새 대통령은 루즈벨트보다 머리가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놈이 그놈이었소. 제 놈들에게 대가리는 장식용인가 보오.”
괴링부터 헤스까지 너 나 할 거 없이 월리스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병신이라고 입을 모아 까댔지만 정작 미국 내부의 혼란은 서서히 줄어드는 추세였다.
대통령이 자신들의 요구사항 관철을 약속했으니 더 이상 시위할 명분이 없는 데다 미국이 아직 전쟁 중이라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외부의 적을 두고 언제까지고 서로 싸워댈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여전히 대독전에 반대하는 반전파들은 시위를 벌였고 BLR은 정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다며 투쟁을 계속할 것임을 선언했다.
KKK 같은 남부 골수 인종차별주의자들 역시 정부가 뭐라고 하든 간에 흑인 사냥에 열을 올렸다.
미국 내부의 소란이 완전히 끝나려면 적잖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지만, 예상보다 일찍 혼란의 끝이 보이는 것은 독일에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협상도 물 건너갔으니, 미군의 추가 증원군이 대서양을 건너기 전에 속전속결로 영국 점령을 완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방금 롬멜에게서 옥스퍼드 점령을 완료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아무튼 잘됐군. 힘러, 자네가 말한 대역들은 영국에 도착했나?”
“예. 총통 각하께서도 직접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저들의 연기력은 누구보다 완벽해서 실제 국왕과 왕비라 해도 믿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들 명심하시오. 전쟁은 시간이 생명이오. 아군의 전진이 늦어질수록 영국에 도착하는 미국의 물자와 병사 수는 배로 늘어날 것이오. 여기서 더 꾸물거리다간 전쟁의 승패를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오. 아시겠소?" “명심하겠습니다.”
브리튼 섬을 점령하고 해안가 일대를 요새화해 미군의 상륙 시도를 저지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내년까지 버틴다면 천하의 미국도 결국엔 게임을 던질 수밖에 없겠지.
허나 아군이 전진하지 못하고 밍기적거린다면 워싱턴의 인간들은 아직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지금 전세가 아군에게 유리하다곤 하나 사기적인 물량의 미국이 본격적으로 덤벼든다면 독일이 밀릴 수밖에 없다.
“총통 각하. 기쁜 소식입니다.”
“이번에는 뭔가?”
“방금 아일랜드가 영국에 선전포고했습니다.”
드디어!
“좋아. 그 친구들, 말로만 참전한다고 하고 지금까지 조용해서 호구 당한 거 아닌지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 안심이군.”
아일랜드가 참전했으니 미국 내 대독전 반대여론은 더욱 거세질 터.
많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영국을 도와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아일랜드계인 것과 별개로 참전에 찬성하거나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미국인들의 비중도 상당했다. 그런데 아일랜드가 영국에 선전포고했으니 자연스레 미국은 아일랜드와도 싸워야 한다.
이걸 그냥 넘길 수 있는 아일랜드계의 비중이 얼마나 될까?
내가 보기엔 10%도 안 될 것 같은데.
***
1943년 7월 11일
영국 글래스고
루즈벨트의 죽음이라는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찾아온 아일랜드의 참전.
아일랜드의 군사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아일랜드라는 네 글자가 가지는 힘은 대단했다.
비록 몸은 미국에 있지만, 영혼만은 아일랜드에 두고 왔다고 자부하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옛 조국과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한 목소리로 대독전 반대를 외쳤다. 아일랜드의 참전이 영국에게 악재인 것과 별개로 영국인 중에서 아일랜드의 참전에 충격받거나 경악하는 이들은 없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측했다.
영국과의 관계가 최악인 아일랜드가 독일 편을 들어 영국을 공격하리라고. 다만,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만 몰랐을 뿐이지.
그런 영국인들도 소식이 끊겼던 국왕과 왕비가 사실은 살아있다는 소식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일의 전시영화 뉴스에 등장한 국왕과 왕비는 독일군 군의관들에게서 치료받고 있었다.
비록 전신이 미라처럼 붕대로 칭칭 감겨 있다고는 하나 영상에서 나온 얼굴은 누가 봐도 조지 6세의 그것이었다.
-영국의 국왕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는 전쟁에 찬성한 전범임에도 자비로운 총통의 은혜로 독일 최고의 의사들에게서 치료받고 있다!
-우리 독일은 제아무리 적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생명부터 살리고 본다.
-고로 영국인들이여, 무의미한 전쟁을 멈추고 이제라도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게 어떻겠는가?
영국 국왕과 왕비가 적국에 포로로 잡힌 초유의 사태 앞에 전 영국인들이 충격에 빠졌다.
“국민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항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일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독일이 국왕과 왕비를 처형할 리는 없다. 그랬다간 전 영국인들과 죽을 때까지 전쟁을 벌여야 할 테니.
하지만 사람들은 독일의 협박이 없음에도 불안해했다. 전쟁을 계속하다가는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의 안전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그리되기 전에 차라리 독일과 협상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선전영화에 나온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가 가짜일 가능성일 가능성은…………?”
“나치가 속임수를 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얼굴만 보면 틀림없는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십니다. 총리께서는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봤지."
처칠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망할 히틀러와 똘마니들이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고, 영상에 나온 국왕과 왕비는 대역이라고 믿고 싶었다.
허나 선전영화 속의 그 둘이 진짜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가짜라고 하기엔 얼굴이 너무나 닮았다. 뉴스영화를 보던 처칠이 너무 당황해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말이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확실하게 알 수 있으련만. 그런데 독일 측의 설명에 따르면 둘 다 의식이 없어 말할 수 없는 상태다.
결국, 영화 속의 국왕과 왕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려면 그 둘과 직접 만나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 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보려고 하니 그 둘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을 독일이 승낙할까? 퍽이나.
미치겠군, 정말.
***
-콰아앙!!
“포격이다! 엎드려라!”
"숙여!"
느닷없이 포격이 시작되자 병사들은 벗어뒀던 철모를 황급히 머리에 걸치며 고개를 숙였다.
독일의 포로가 된 국왕과 왕비 얘기로 영국 전역에 떠들썩하지만, 최전선의 병사들에게는 국왕 부부가 가짜냐 진짜냐는 사실보다 당장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가 더욱 시급한 문제였다. 프랑스군 포병대대의 포격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105mm 야포의 포격이 끝나고 프랑스군은 보병들과 전차를 투입했다.
상대인 영국군은 1개 대대로 프랑스군과 같은 규모였지만 전차가 없으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비바 프랑스를 외치며 돌격해오는 프랑스군을 영국군들은 이를 갈며 응시했다.
망할 배신자 새끼들! 저놈들을 위해서 3년 전 대영제국의 병사들이 목숨을 바쳐 싸웠건만!
“어이, 홉킨스! 아직도 쭈그려 앉아서 뭐해?"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총에 흙이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제길.”
“서둘러. 프랑스 놈들이 오고 있으니까………… 온다!”
프랑스군을 처음 맞이한 것은 포격에서 살아남은 지뢰들이었다.
땅에 묻어둔 지뢰들이 폭발하며 전차의 궤도와 주행기구를 박살 내고, 파편을 사방으로 뿌려 프랑스군 병사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지뢰밭을 건너 돌격해온 전차들에 2파운더와 6파운더의 불탄이 날아들었다.
2파운더는 어찌해서 튕겨냈다고 해도 6파운더에는 어김없이 관통되었다.
“물러서지 마라! 계속 돌격!”
“프랑스를 위해! 비바 프랑스!”
공격에 동원된 전차들은 1개 중대 총 12대. 이중에서 4대가 격파당했지만, 프랑스군은 퇴각하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망할. 저 정신으로 3년 전에 싸워보지!”
그레이엄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3년 전에 그가 프랑스에서 본 프랑스군은 십중팔구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거나 독일군에게 투항하는 오합지졸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돌격해오는 프랑스군은 3년 전의 그 프랑스군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전투에 진심이었다.
독일과 싸울 때는 질질 짜면서 도망치더니 옛 동맹국과 싸울 때는 정반대라니. 그레이엄은 울화가 치밀었다.
물론 모든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무력하게 항복하거나 도주한 것은 아니고 영국군 못지않게 용맹하게 싸운 부대도 많지만, 그레이엄이 그것까지 다 감안할 입장은 아니었다. “사격 개시!"
적 보병들이 소총과 기관총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보병들의 소화기가 불을 뿜었다.
그레이엄은 호흡을 가다듬고 리-엔필드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홉킨스도 총기 수리를 끝내고 일어서서 방아쇠를 당겼다.
홉킨스의 손에 들린 기관단총은 인도에서 영국군이 노획한 MP3008을 영국 기술자들이 개조해서 만든 물건이었다.
성능은 대단히 조악하지만, 값싸고 빠르게 대량양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고평가한 처칠의 지시로 양산된 것이었다.
기관단총 이름은 스텐(Sten). 스텐 기관단총을 노획한 독일이 스텐을 참고해서 MP3008을 만들어낸 것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콰앙!
위치가 노출된 2파운더가 유탄 세례에 대전차포병들과 함께 날아가고 루이스 기관총의 탄창을 교체하던 홈가드 대원이 벌집이 되어 개인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씨발! 저 좆같은 개구리들도 전차가 있는데 왜 우리는 없는 겁니까?”
홉킨스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총성이 커서 조곤조곤 말해선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쐈지만 금방 총알이 바닥나 재장전하고, 다시 총알이 떨어져서 재장전하다 보니 어느새 탄을 절반이나 소모하고 말았다. 이쯤이면 적들도 지쳐서 물러설 법도 한데 프랑스군은 계속해서 공격해왔다. 시계를 보니 전투가 시작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레이엄은 시계가 고장 난 줄 알았다.
"끄아아아-!"
적 보병이 투척한 수류탄에 왼쪽 다리가 날아간 중위가 소뮤아 S40의 궤도에 짓눌러 으스러졌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 당장 퇴각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중대는 전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어어???
애타는 마음으로 퇴각 명령을 기다리며 방아쇠를 당기는데 뜻밖의 지원군이 나타났다.
전진하던 소뮤아 S40의 장갑에 구멍이 뚫리면서 포구로부터 불꽃이 쏟아졌다.
“아군 전차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의 등장에 병사들은 환호했다. 나무들을 줄지어 쓰러뜨리면서 등장한 M4 셔먼의 포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소뮤아 S40이 불덩이가 되어 정지했다. 포탑 후면의 해치를 열고 찢어진 군복 차림의 전차장이 기어 나오다가 전차에서 굴러떨어졌다.
소뮤아 S40도 셔먼처럼 75mm 주포를 탑재했지만, 프랑스제 75mm 주포보다 셔먼의 75mm M3 전차포의 관통력이 더 높았고, 셔먼의 장갑도 소뮤아 S40보다 더 두꺼웠다. 그로 인해 셔먼은 소뮤아 S40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지만, 소뮤아 S40들은 셔먼의 공격이 명중만 했다 하면 돼지 통구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새끼들, 참 빨리도 온다.”
“이제라도 온 걸 감사히 여겨라.”
셔먼 중대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여기에 그간 보이지 않았던 RAF까지 등장해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미국으로부터 공여받은 썬더볼트가 저공으로 비행하며 12.7mm 총탄을 난사하고 폭탄을 투하했다.
기세 좋게 공격해오던 프랑스군은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쳤다.
“도망치는 모습만큼은 3년 전이랑 똑같군.”
퇴각하는 프랑스군의 뒷모습을 보며 그레이엄이 남긴 말이었다.
썬더볼트 편대가 다리를 끊어놓은 탓에 퇴로가 막힌 프랑스군은 자신들을 추격해온 셔먼이 나타나자,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다. 한때 동맹군이었다가 지금은 적군이 된 프랑스 병사들을 영국군은 독일군을 향할 때보다 더 증오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좆같은 개구리 새끼들. 히틀러 좆이 그리 좋아, 응?”
“이 개새끼들!" “싹 다 죽여!”
배신자들에게 자비란 있을 수 없었다.
포로들이 자비를 구걸하기도 전에 총성이 여러 번 울렸다.
즉사하지 않은 포로들을 영국군 병사들이 개머리판으로 내리쳐 두개골을 으스러뜨렸다.
그레이엄은 학살의 현장에 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포로들을 학살하는 병사들을 저지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가 말린다고 다른 병사들이 호응해 줄 리도 없을뿐더러 굳이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옛 동맹을 배신하고 적국인 독일의 편에 붙어 조국을 침략한 배신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비도 베풀 상대에게나 베풀어야 하는 법. 만약 이들이 프랑스군이 아니라 독일군이었다면 목숨은 부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학살극이 끝나기가 무섭게 후방의 지휘본부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철수 명령이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학살한 프랑스 병사들을 땅에 파묻지도 않고 내버려 둔 채 짐을 챙겨 떠났다.
전쟁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서로를 향한 증오의 연쇄는 더욱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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