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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 - 28. 협상의 실체
잠시 시간을 달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간 케런과 학장.
묵직하니 문이 닫히자 내 양 옆에서 병풍처럼 서 있던 다리우스와 데이아가 바로 몸을 틀어서 외친다.
“갈 생각이 없던 거냐?”
“뭐야, 진짜로 안 갈 거야?”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괜히 어깨에 힘이 풀렸다.
썩 어울리는 합창이었다.
“그 조건들은 너무 과하지 않아? 그리고 1억 5천에서 정리한다고 말했잖아.”
걱정스러운 듯 물어오는 데이아. 내가 복직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보다는 노스웨든에 계속 머물 가능성이 있다는 게 걱정인 듯 보였다.
“요구조건들이 너무 크다. 사적출장 정도는 들어줄 수 있어도 연구기재 사유화랑 밀리니엄 도서관 금서 열람권은…….”
다리우스 역시 마찬가지로 무리한 조건이었다고 안색이 나빠졌다. 그 역시 내가 여기에 있다 보면 가주 자리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보내고 싶어 했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두 사람이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아카데미는 지금 시간이 없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불러들였다는 사령술사 이후로 죽은 사람은 없겠으나, 그래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꽤나 많을 것이다.
악령들의 심기를 아주 제대로 자극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진짜, 복직할 거지?”
“그래, 할 생각이다.”
초조한 듯 물어오는 데이아의 물음에 한숨을 내쉬며 답해주자, 옆에 있던 다리우스가 팔짱을 끼며 턱을 쓰다듬는다.
“네가 이렇게까지 대단한 취급을 받게 될 날이 올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했다. 2억이면 내 개인자산을 훌쩍 뛰어 넘었군.”
“개인자산이 있어? 모든 현금은 가문에 종속된 거 아니었어?”
“크흠.”
바로 첫째 오빠를 노려보는 데이아. 아무래도 협상이 끝난 이후에는 두 사람이 따로 또 협상에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
“하여간 이것들은 어디 뒤에 꽁쳐놓은 게 많아서는.”
힐끔 나를 노려보는 데이아에게 어깨를 살짝 으쓱인다.
“나는 없다.”
“그러시겠지! 그거 말고, 사령술 같은 위험한 거나 배웠잖아! 가문 위험하게.”
그거에 관해서는 따로 할 말은 없었기에 입을 꾹 다물자, 데이아가 기가 막히다 코웃음 친다.
“하여간 가문 생각하는 거 나밖에 없다니까? 둘 다 얼른 어디로 가버려! 내가 가주돼서 책임지게!”
“크흠.”
다리우스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못 들은 척 했고, 나 역시 살포시 눈을 감으며 여동생의 땍땍거림을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문득, 이런 게 가족일까 라는 생각이 살짝 들어 입 꼬리가 움찔했으나 곧이어 평정심을 유지했다.
밖에서 들려온 노크소리에 다리우스에게 따지고 들던 데이아가 바로 다시 자세를 잡는다.
다리우스 역시 불편하단 표정을 억지로 지어 보였다.
아카데미 측에 나를 보내지 않겠다는 느낌을 주자고 처음부터 협의된 사안이었다.
들어오라 답해주자 학장과 케런이 다시금 협상 자리에 섰다.
방금까지 하얗게 얼굴이 질려서는 땀을 뻘뻘 흘려대던 학장은 머리를 좀 식혔는지 한결 차분해진 표정이었다.
케런이 말할 줄 알았는데 학장 쪽에서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조건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단순 교수가 아니라 다른 자리를 원하시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복직을 재고해주세요.”
실로 옳은 판단이었다.
만약 그가 협상을 계속하려고 했다면 나는 또 하나씩 조건을 추가했을 것이다.
아마 그걸 알았기에 케런 역시 그냥 빨리 받아들이는 게 출혈을 줄이는 거라고 충고했겠지.
“저희 아카데미에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제가 아닌, 학생들을 위해서. 그것 하나만큼은 진실입니다. 아직 창창하고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장소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눈물 섞인 목소리로 애원하는 학장. 여러 정치적 이유가 있음은 분명했으나, 이렇게 끝까지 몰린 그가 결국 선택한 건 학생이었다.
잠시 고심하는 척.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린다. 학장에게 있어서 지금 이 시간은 그야말로 천금처럼 묵직하겠지.
그렇게 끌 수 있는 만큼 시간을 끌은 후, 나는 속 시원하니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좋습니다.”
“아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드는 학장. 그의 얼굴에서는 진정으로 행복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다만, 조건 하나 더 추가합니다. 다른 자리는 필요 없이 저는 교수면 충분합니다. 거기에 이번 1학년을 가르치고 싶군요.”
“그,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 조건이 가장 쉽다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학장.
요번 1학년은 황금의 기수로 많은 교수들이 탐내고 있었으나, 이 정도 조건은 학장 재량으로 충분히 가능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고, 학장은 쪼르르 달려와서는 내 손을 맞잡았다.
“계약서를 쓰시죠.”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 뒤는 금방 지나갔다.
어차피 계약 조건 수정이야 금방 할 수 있고 세부조항들은 이미 확인을 끝마쳤다.
계약서를 보면서 부들부들 손을 떨고 있는 학장은 자신이 큰일을 하나 해냈다는 성취감에 쌓여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케런이 나서며 말했다.
“바로 출발하실 수 있으실까요? 지금 아카데미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마, 맞습니다. 지금도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고통 받고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목소리에는 안타깝게도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힘듭니다. 저는 아직 노스웨든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에밀리의 장례를 아직 치러주지 못했다. 소녀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함께해줄 생각이었기에 나는 갈 수 없었다.
“그, 그건…….”
“두 분께서 먼저 출발하시죠. 아무리 오래 걸려도 이틀 정도면 저도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학장은 끙 하고 입을 다물었고 케런은 이 이상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아카데미의 사태가 심각하다는 소리.
그렇기에 나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는 말을 내놓았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제 전속하녀가 아카데미에 도착해서 미리 해결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도착했을 거라고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케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노스웨든에서 로베른 아카데미는 꽤나 거리가 있어서 이렇게 바로 도착할 수는 없는데요.”
“호, 혹시 워프 마법의 구사가 가능하신 겁니까?!”
케런이 말하는 도중 옆에서 끼어든 학장. 하지만 케런도 그 말을 듣고는 휘둥그레 눈을 뜬 채로 데이우스를 바라본다.
설마 베르디 가문이 워프 마법까지 실전으로 도입 가능한 수준의 마법사를 데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기대가 부담스러운 듯 다리우스와 데이아는 슬며시 몸을 틀어 눈을 피했다.
뭔가 꺼림칙한 비밀을 걸렸다는 듯 민망해했으나 나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아뇨, 미리 출발시켜뒀습니다.”
“예?”
어벙하니 입을 벌린 두 사람. 어차피 이미 알려질 것도 다 알려졌고. 서로의 패도 다 까졌으며.
판은 끝났다.
마술사는 굳이 트릭을 설명해주지 않고, 겜블러는 다이를 외친 상대에게 카드 패를 보여줄 필요 없으나.
오늘은 흡족한 결과를 얻었기에.
나는 두 사람에게 이 협상 테이블의 실체를 알려주기로 했다.
“두 분이 오시기 며칠 전부터, 이미 제 하녀를 출발시켜뒀습니다. 아카데미의 정상화를 위해서.”
학장은 아직도 제대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케런은 달랐다.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이마를 탁 치고는 황당하다 말했다.
“당신, 이미 처음부터 아카데미로 복직할 생각이었군요?”
굳이 답하지 않은 채 부드러이 고개만 끄덕여준다.
아카데미는 내게도 굉장히 중요한 장소였다.
주인공 일행이 입학하는 시기였으며, 그들의 성장을 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특히나 교수라는 직책은 내게 있어 굉장한 메리트가 있었기에.
나는 가능하다면 무조건 아카데미로 돌아갈 생각이다.
“하, 하하.”
완전히 당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케런. 자신들이 압도적인 을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꽤나 해볼만한 상황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허탈하다는 감정이 얼굴에서부터 진득하니 묻어나오고 있었다.
* * *
“어휴, 도시 공기라 그런가. 킁킁, 묘하게 공화국 생각나서 기분 더럽네.”
마차에서 짐을 내린 백발의 메이드, 핀덴아이는 코를 킁킁 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노스웨든에서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왕국의 중심부에 인접하게 들어오다니.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탕탕!
“고생하셨수, 잘 돌아가.”
마차를 쳐주자, 마부는 손을 흔들며 핀덴아이에게 인사를 하고는 고삐를 내리쳐 말을 몰기 시작한다.
마차가 떠나가고, 짐을 둘러맨 핀덴아이는 그리핀 왕국 최고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로베른을 보며 씨익 웃었다.
“캬, 때깔 봐라. 이런 데서 공부하면 나라도 신나겠다.”
워낙 적나라한 메이드복인지라 주변의 사람들의 눈에 확확 띄고 있으나, 이미 그런 시선들에는 익숙해진 핀덴아이가 당당한 발걸음으로 아카데미 정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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